
나는 이천오백팔십육 년 전 인간 ‘싯다르타’다. 히말라야 기슭에 있는 네팔 남부와 인도 국경 부근 샤캬공화국 카필라성에서 아버지 슈도다나와 어머니 마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슈도다나는 샤캬족의 왕으로서 오랫동안 아들을 얻지 못해 걱정이 많았는데 어머니 마야가 어느 날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흰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나를 임신했다고 한다. 어머니 마야는 나를 낳기 위해 친정집이 있는 구리성으로 향하는 도중 룸비니 정원 무우수(無憂樹) 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진통이 와 무우수 나뭇가지를 잡고 오른쪽 겨드랑이로 나를 낳았다고 한다. 그날이 음력 4월 8일이다.
내가 태어나자 하늘에는 오색구름과 무지개가 피어났고 가릉빈가가 나를 반겨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할 때 나는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을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라고 말했다. 나의 탄생에 온 백성이 축하함은 물론, 샤캬족과 샤캬공화국의 위대한 탄생으로 모든 축복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내가 태어나고 이레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갓난아이가 슬픔이 무엇인지 모를 일이지만 나는 그 슬픔을 막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죽음이 무엇이기에 갓난아이인 내게 그 슬픔이 전해지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나는 왕자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누리며 살았다. 엄청난 공부를 해야 했고 기예도 배우며 장차 왕이 되기 위한 전방위적인 학문을 쌓아나갔다. 이모가 어머니를 대신해 나를 양육하며 훌륭한 인격을 갖추기 위해 많은 훈련을 시켰다. 나는 왕가의 풍습에 따라 열여섯 살에 콜리야 왕국의 공주 야쇼다라와 결혼했다. 그리고 아들 라훌라를 얻었다. 나는 아름다운 왕비도 있고 귀여운 왕자도 있고 곧 이 나라의 왕이 될 존재였다. 안락하고 행복하고 근심 걱정 없는 완벽한 삶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위대한 왕이 되길 바라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왕궁에서 풍요롭고 행복했지만 늘 세상 밖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궁금했다. 어느 날 궁궐 밖으로 나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손발이 트도록 너른 밭을 갈아야 하는 농부의 삶은 행복이 아니라 고통인 것을 알게 되었다. 늙고 병들은 가여운 노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삶이 저런 것이라는 걸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기에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그 운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궁 밖에서 본 사람들에게 받은 충격으로 인해 우울증에 걸릴 정도였다. 아버지는 그런 나의 마음을 눈치채고 세상의 번뇌와 고통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감추기에 급급했고 내가 혹여 출가라도 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스물아홉이 되는 해 어느 날 밤, 나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제 결심하지 않으면 내 일생을 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궁궐 밖에서 만난 노인과 병자와 죽은 사람과 승려 등 많은 사람의 고통으로부터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에게 있는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나는 비로소 왕궁을 떠나 출가를 위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다 내려놓고 나니 홀가분했다. 이처럼 나를 자유롭게 한 것은 여태껏 없었다. 브라만 수행자와 여러 스승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 단식도 하고 결가부좌를 유지하는 등 인간 근원에 대해 배우고 혹독한 고행도 해보았지만, 몸만 괴롭게 하는 것일 뿐 진정한 인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게 사람을 보내서 왕궁으로 돌아올 것을 권했지만, 내 마음이 변함없음을 알고 다섯 명의 수행자를 보내 나를 수행하게 했다. 그렇게 육 년을 같이 고행했던 수행자들도 결과물이 없자 모두 떠나갔다.
나는 아무리 훌륭한 스승 아래서 수행한다고 한들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인지하고 수행 방법을 중도로 바꾸기로 했다.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명상에 들었다. 명상에 잠긴 지 이레 만에 나는 드디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내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출가 전의 쾌락을 좋아하는 것과 출가 후의 고행에 심취하는 것에 치우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있는 그대로 보면서 걸림이 없는 상태의 중도에 진실한 깨달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룰 때 수행의 길이 보이고 삶의 가치를 이룰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이후 나를 떠났던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가장 먼저 설교했다.
실천적 윤리로서의 중도는 구체적인 실천을 할 때만 깨달음의 길이 보이는 것이다. 나의 사상은 평등주의에 있다. 태어날 때 혈통에 의한 신분이나 계급은 의미가 없으며 오직 수행에 의해서만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설법했다. 이는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그렇다 나는 인도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혁신가이며 사상가로 불교를 통해 인간에 대한 사랑을 펼치며 존경받기 시작했다. 나의 사상은 휴모니즘을 넘어 초계급적으로 뻗어나가며 관용과 겸허함으로 대중을 향해 다가갔다.
나는 베나레스 녹야원으로 가서 열반과 해탈에 이를 수 있는 네 가지 진리와 그 실천 방안을 설법했다. 우리가 여기에 태어났다는 것이 아픔의 뿌리이며 태어나서 늙게 되는 것 또한 아픔이다. 살아가면서 병이 들면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고 인생이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아픔이 있다. 또한 사랑하고 헤어지는 아픔과 미워하는 아픔과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아픔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것은 고통이다. 그 고통은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번뇌를 모두 없애 버리면 절대적 자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활하고 바르게 노력하고 바르게 새기고 바른 정신을 가지면 진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따르는 수행자들이 몰려들었다. 사리불, 목건련, 마하가섭, 수보리, 부루나, 가전연, 아나율, 우바리, 라후라, 아난다와 함께 수행하며 대중을 교화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다. 오래도록 수행에 정진하다 보니 어느새 내 나이 팔십 살에 이르렀다. 파바시에서 받은 공양을 먹었는데 음식이 상했는지 식중독을 앓게 되었다. 금식을 자주 한 탓에 장 활동이 약해져 생명이 위독해졌다. 나는 최후의 목욕을 마치고 사라나무 숲속으로 들어가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서 자리를 깔았다.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머리는 북쪽을 향했다. 발은 남쪽으로 두고 얼굴은 서쪽을 향해 누웠다. 나는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유언을 했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은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