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 있기에 인간이다. 근심이 있기에 또한 인간이다. 인간이란 생로병사하고 희로애락에 휘둘리며 위태롭게 겨우 살아가는 동물이다. 꿈이 있으니 다행이고 근심이 있어 불행하지만, 행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딱 달라붙어서 평생 같이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 만해의 시 ‘꿈과 근심’을 보면 근심이 하도 많아서 꿈도 길 줄 알았더니 임을 보러 가는 길에 반도 못 가서 깨었다고 한다. 만해도 꿈과 근심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며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인생의 강을 건넜나 보다.
밤 근심이 하 길기에
꿈도 길 줄 알았더니
님을 보러 가는 길에
반도 못 가서 깨었구나.
새벽꿈이 하 짧기에
근심도 짧은 줄 알았더니
근심에서 근심으로
끝 간 데를 모르겠다.
만일 님에게도
꿈과 근심이 있거든
차라리 근심이 꿈 되고
꿈이 근심되어라.
만해, 너른 바다 가없는 바다 그 바다를 노 저어 가는 한 인간의 고통은 우리 모두의 고통이다. 누구나 삶은 고통의 바다다. 이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 지리멸렬한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에 천착하고 철학에 기대고 문학에 사로잡힌다. 삶은 끝없는 고통의 바다다. 고통이라는 숙제를 끝내지 않는 한 우리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랑도 종교도 철학도 문학도 인간에게는 등대에 지나지 않는다. 저 인생 나그네가 여행하는 길에 불을 밝혀줄 등대에 불과한 것이다.
만해의 시처럼 근심이 꿈이 된다. 근심은 각질처럼 우리 몸에 늘 붙어 다닌다. 각질이 옹이처럼 단단해지면 그 또한 몸의 일부로 살면서 어느 날 문득 보면 저절로 떨어져 나가 있다. 그 자리에 새살이 돋아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새살은 꿈이 된다. 근심과 꿈은 동전의 양면처럼 꽉 붙어서 살아간다. 근심과 꿈은 원수와 은인 같은 존재다. 그게 인간으로 살아가는 맛이다. 지옥만 있다면 천국을 모르고 천국만 있다면 지옥을 모르는 것과 같다. 인간이란 지옥과 천국을 같이 품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해 한용운의 삶도 꿈과 근심이 한 몸처럼 붙어 살면서 인간의 맛에 중독된 인간적인 사람이다. 만해는 아내와 자식을 두고 출가해서 대처승이 되었다. 조선에서는 대처승이 불법이었지만 일제 식민지로 넘어오면서 승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가해 달라는 건백서를 대한제국 중추원과 한국통감부에 올린 것도 만해다. 만해는 승려 신분으로 1931년에 재혼하여 딸을 낳았다. 1879년 고종 16년에 태어나 14살에 지주의 딸인 전정숙과 결혼해 아들을 낳고 살았지만, 가출해서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다. 아버지는 관군으로 농민군 토벌에 앞장섰고 만해는 농민군이 되어 아버지와 대치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만해는 약 일 년가량 농민군으로 활동하다가 설악산 백담사로 가서 불교 서적에 푹 빠져 살았다. 금강경을 번역하면서 승려가 되어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승려라고 산속에서 도만 닦지 않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불교학원과 명진학교의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을 발행하여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계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박헌영과 함께 조선불교 종무원을 창설하고 ‘채근담’ 국한문 혼용체 주해본을 저술했다. 그리고 1917년에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게 된다.
“만일 님에게도 꿈과 근심이 있거든 차라리 근심이 꿈 되고 꿈이 근심되어라.”는 만해는 꿈과 근심을 분별하지 않고 그저 한 몸에 지닌 채 수행자로 독립운동가로 시인으로 열심히 산 사람이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근심인지 우리는 늘 따지고 괴로워하지만 만해는 그게 다 소용없는 일이니 꿈이 근심이 되든 근심이 꿈이 되든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면 근심도 꿈이 되고 꿈도 근심이 되어 아무렇지 않게 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근심한다고 근심이 없어지지 않는다. 근심을 상품으로 만든 보험사들이 근심으로 먹고사니 근심은 꿈인 셈이다.
한국불교는 만해로 인해 대중화가 되고 만해는 아름답고 쉬운 한글로 시를 써서 식민지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만해의 대표작 ‘님의 침묵’은 만해가 얼마나 한글을 사랑하고 또 사람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우리는 지겹도록 님을 부처님이나 조국이라고 배움을 강요당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얼마나 명징한가. 시는 그냥 그대로 느끼면 그게 다다. 시를 해석의 틀어 넣어 강요하지 말자. 그러면 근심이 된다. 만해는 말하지 않던가.
차라리 근심이 꿈 되고
꿈이 근심되어라.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