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던 동네 초입에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편의점도 없고 상권 경쟁도 심하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워낙 후미진 골목인 탓에 장사가 그만저만한 곳이었다. 주인이 이태 남짓마다 바뀌는 꼴로 봐서는 아무래도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때마다 가게의 분위기와 손님 응대 방법도 서로 달랐다.
대체로 주인들이 상냥하고 친절한 편이었지만 때로는 무뚝뚝하거나 무성의한 사람도 있었고, 자기 가게이면서도 일 자체에 불평과 짜증을 담아 손님에게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끝전을 빼주거나 덤을 챙겨주는 인심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 매정할 정도로 잇속이나 실속을 챙기는 모습이 눈에 뻔히 보이는 단작스러운 사람도 있었다.
어느 날도 갑자기 주인이 바뀌었다. 중년의 부부였는데, 장사꾼인가 할 정도로 첫인상에 미욱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모름지기 장사라면 상술과 수완이 눈에 보여야 할 텐데 수단도 경험도 없는 숫보기 같았다. 손님이 들어와도 엉거주춤 인사에 감칠맛이 없고, 물건값 하나도 들쑥날쑥 제대로 외우지도 못했다.
물건을 담아주는 손놀림도 복장 터질 만큼 느리고, 셈을 하는데도 엊그저께 더하기 빼기 배운 사람처럼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성질 급한 손님들이 아예 물건값을 대신 계산 해주면 ‘히~’ 웃으며 그대로 돈을 받고, 달라는 대로 ‘흐~’ 하고 거리낌 없이 잔돈을 내어주는 것을 보면 저러다 몇 달 못 가서 망하고 말지 싶었다. 사람들은 순해서 좋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어수룩하고 우둔해서 장사할 깜냥은 아니라고 혼자 단정 지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불편과 못마땅함이 있는데도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편히 살 수 있는 물건도 수고를 마다치 않고 그 가게를 찾아가게 되는 것도 뜻밖이었다. 그 가게는 분명 무언가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호사스러운 인사는 아니었지만 반가운 사람을 만난 듯 친밀한 표정이 있었고, 좁은 공간에서도 물건들을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정리해두는 정성이 있었다.
어린 자식들이 부모에게서 세뱃돈 받듯 공손하게 돈을 받았고, 잔돈을 거슬러줄 때는 꼭 깨끗한 지폐나 반짝이는 동전만을 골라 내주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실수나 착오라도 있으면 요령 있게 변명하면 될 텐데 안절부절못하며 죄송하다는 말부터 먼저 하는 솔직함과 단순함이 있었다. 잔꾀와 기교는 없었지만, 성의와 인정은 많았다. 남들처럼 세련된 표정이나 말과 행동은 부족했지만 따뜻한 마음씨와 진심과 부지런함은 충분했다.
그들에게선 사람 냄새가 났다. 그는 길을 가다가도 힘들거나 어려운 처지인 사람을 보면 허투루 지나갈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집을 방문하면 그동안 아껴두었던 음식이나 술안주를 꺼내오고, 하룻밤 자고 가기를 고집하며 군불 땐 방에 하얀 호청을 낀 솜이불을 깔아 곡진하게 대접할 것만 같다.
험하고 궂은일로 연락하면 맨 먼저 달려와 자기 일처럼 도와줄 것만 같다. 주위에 아쉬운 소리, 볼멘소리도 할 줄 몰라서 누구에게도 상처나 부담을 줄 것 같지도 않다. 한 개라도 더 가져도 모자라는 욕심 많은 세상에 한 개라도 덜 가져야 도리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일 것만 같다. 있어도 눈에 띄지는 않지만 없으면 무언가 허전한 그런 사람들이었다.
훈련된 친절에는 진정성이 없다. 반쯤 꺾인 허리 인사에도 무례와 무시가 있고, 가벼운 고개 인사에도 경외와 호의가 있는 법이다. 겉으로는 모를 것 같아도 그 숨겨진 마음의 태도는 누구나 알고 있다. 친절은 지식과 기술이 아니라 호의적이고 성의 있는 마음가짐에서 출발한다. 물어보면 대답하리라, 어떻게 할 줄 몰라 두리번거리는 사람에게 멀거니 쳐다만 보고 기다리는 것은 직무 한도 내의 친절일 뿐이다. 대가가 있어야 베풀리라, 숨어있는 도움은 외면하고 남들 보는 앞에서만 알은체하는 것은 자기과시용 친절일 뿐이다. 상처를 주고 약을 발라주는 계획된 친절보다, 처음부터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배려심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한다.
어느 날 그 가게에, 대여섯 살 먹은 아이를 데리고 한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남의 집 도우미 일을 하느라 매일 집을 비운다는 그 아주머니는 혼자 있는 아들에게서 심심찮게 빈 과자봉지가 나뒹구는 것을 보고 추궁을 했다고 한다. 놀란 아이가 울면서 이 가게에서 매번 훔쳤다고 부모 가슴에 못을 박는 고백을 했다. 당연히 용서도 구하고 보상도 해야겠기에 얼마간의 돈을 가져왔노라고 사죄했다.
그런데 모르는 척, 주인 내외는 고개를 가로질렀다. 내 자식 보듯 꼬마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손에 쥐여주었을 뿐이지 이 아이가 훔친 것이 아니라고 극구 손사래를 했다. 또 한 번 가슴이 아려왔지만, 이번엔 봄 햇볕처럼 따뜻한 것이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고맙다는 말로 몇 번이고 사죄를 한 뒤 과자를 한 아름 안고는 밝은 얼굴이 되어 돌아섰다. 엄마의 손을 잡고 가던 아이가 고개를 힐끔 돌려 눈을 똥그랗게 뜨고 가게 아주머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세상에 바보는 없다. 어리석고 요령 없어 보이지만 살아가는 방법과 방향이 다를 뿐이다. 누구나 자신을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기지만 실상은 보이지 않는 실수와 실패를 수없이 반복하며 살아간다.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한 세상에 제아무리 실리와 처세로 무장한다고 해서 삶 전체가 완벽하거나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선하고 순하게 사는 마음은 바보가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가는데 가장 확실한 능력이고 밑천인지도 모른다.
그 가게는 날로 손님들이 많아지고 해마다 규모가 커졌지만 주인 내외의 성의와 호의는 여전했다. 다만 전자계산기 사용이 조금 능숙해졌을 뿐이다. 약삭빠른 세상을 볼 때마다 가끔 그들이 생각난다. 그곳은 바보네 가게가 아니었다.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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