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사연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이 땅의 자살률은 자그마치 십 년도 훨씬 넘게 OECD 국가들 가운데서 압도적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모진 핍박의 시기였던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연이어 6·25 한국전쟁의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해 온 민족이 아니던가. 그런 우리가 어쩌다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汚名을 얻게 되었는지, 일변으론 안타깝고 일변으론 서글픈 마음마저 든다.
주지하다시피 대한민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강의 기적으로 불릴 만큼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빛과 그림자는 언제나 공존하는 법, 그 이면에는 툭툭 불거져 나오는 문제점들도 만만치 않다. 그 한가운데에 자살이 있다. 물질적 성장에 걸맞은 정신적 성숙이 뒤따라가지 못하는 가치 지체현상으로 빚어진 불행한 결과일 터이다.
이러한 현상의 밑바닥에는, 역설적이게도 1960년대 초에 시작된 ‘잘살아 보세’ 운동이 단단히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한번 잘살아 보자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온 부작용일 터이다. 어떻게 해서 잘살아 보려는가가 아니라 무조건하고 잘살아 보려는 심리가 자살률을 높이는 결정적 동인動因이라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 심지어 범죄조차 서슴지 않는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어느 설문 조사를 보면 가히 충격적이다. “돈 몇십 억이 생기는 일이라면 한두 해 동안 감옥살이를 해도 괜찮다” 그 보고서에는 이 질문에 상당수의 청소년이 “그렇다”라고 한 답변을 내놓았다는 결과가 담겨 있었다. 돈이면 호적에 붉은 줄이 그어져도 개의치 않는다는 그들의 일그러진 가치관을 보면서 참 갈 데까지 갔구나, 싶은 탄식이 터져 나온다. 아니, 이것을 어찌 그들의 문제로만 치부할 일이겠는가. 우리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이른바 ‘수저론’이라는 현실풍자 의식이 생겨나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부모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매겨지는 ‘금수저’니 ‘은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신조어가 우리 사회에 계층 간의 위화감을 조성하고, 급기야 상대적 박탈감을 낳는다. 이제는 사회구조가 고착화하여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기를 꿈꾸기 어려운 우울한 세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절대다수의 가치 기준이 오로지 금전의 많고 적음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돈이 없으면 절망감에 빠지게 되고, 이는 자살 충동을 부른다. 그로 인해 휴지 버리듯 목숨을 끊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무릇 무슨 종교이든 인간의 모든 행위 가운데 가장 죄악시하는 것이 자살이다. 그 어떤 이유로도 자살은 용서받지 못할 행위로 간주한다.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만큼 종교가 번성한 곳도 아마 없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촌의 그 어떤 나라보다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자살률이 높은 현상은 참으로 역설적이 아닐 수 없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땅에서만큼은 종교도 구원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방증이 된다.
OECD 국가들 가운데 중산층의 기준을 제시한 자료가 발표되어 눈길을 끈다. 서구의 앞선 여러 나라들에서는 중산층의 기준으로, 외국어를 하나 정도 할 수 있어야 할 것,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 정기적으로 받아 보는 비평지가 있을 것 등을 꼽는다. 반면 우리나라의 중산층 기준은, 부채 없는 30평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을 것, 2,000cc급의 승용차를 굴릴 것, 한 달에 500만 원 이상의 급여를 받을 것 등이다. 다른 외국의 선진국들은 이 기준이 정신적인 가치에 맞추어져 있는데 왜 유독 우리만이 물질적인 가치에 맞추어져 있는 것일까. 참으로 천박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싶은 씁쓸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선비들은 비록 삼순구식三旬九食에 폐포파립弊袍破笠 차림으로 지냈어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고, 범접할 수 없는 기개 하나로 백성들의 우러름을 받았다. 그만큼 그때는 정신적인 가치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비뚤어진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면서 모든 관심사가 오로지 돈, 돈, 돈……, 돈 하나로 쏠려 있다. 그러다 보니 돈 안 되는 것이면 아예 거들떠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책을 읽거나 그림을 감상하는 등의 문화를 향수하는 일은 비생산적이라 치부해 버린다. 국민 1인당 연간 독서량이 OECD 국가들 가운데서 최하위권이라는 사실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 게다가 그마저도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 할 것인가.
자살의 인과관계를 역추적해 보면, 그 근본 원인이 지나치게 경도된 배금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질적인 풍요는 생활의 편리를 가져왔고, 이 생활의 편리가 들어서 사회적 관계망을 느슨하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하여 생겨난 고립과 소외로 조금이라도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면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하게 만드는 순환의 고리를 형성했다.
이러한 현상의 근저에 바로 앞서 언급한 ‘잘살아 보세’가 있지 않을까. 물론 이 노랫말은 본래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이지만, 그것을 왜곡하여 ‘나도 한번 잘살아 보세’로 받아들였으니, 그 대열에 끼지 못하면 상대적 박탈감으로 괴로워하고 걸핏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일 게다. 모든 가치 기준을 물질에 두다 보니 정신적 가치가 피폐한 보과報果다. 결국, 무너진 정신적 가치의 회복만이 불행의 연결고리를 끊는 길이며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는 방도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마음 한구석이 착잡해진다. 아니 우울해진다. 아니, 아니 서글퍼져 온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