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우리 삶이 우화(宇話)이리

이태상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1942년에 발표한 그의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 신화(The Myth of Sisyphus)’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神)들은 시지프에게 쉴 사이 없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형벌을 과하였다. 산꼭대기에 이르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로 말미암아 또다시 굴러떨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무익하고도 끝날 가망이 없는 노동보다 더 무겁고 끔찍한 형벌이 없다고 신들이 생각한 것은 이유 있는 일이었다.
 
대서사시(大敍事詩) ‘일리아드(Iliad)’ 와 ‘오디세이(Odyssey)의 저자로 알려진 기원전 8세기경 유랑시인(流浪詩人)으로 활동했던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영어식 이름은 호머 Homer)에 의하면 시지프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현명하고 성실하며 진중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다른 전설에 따르면 그의 직업은 산적(山賊) 비슷한 것이었다고도 한다. 여기에 아무런 모순도 없다고 해야 하리라.
 
그로 하여금 지옥(地獄)에서 무익(無益)한 노동자가 되게 한 원인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니까.
 
첫째로 신들을 경시(輕視)한 그의 태도와 행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신들의 비밀을 누설(漏泄)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신) 아소포스(Asopos)의 딸 아이기나 (Aegina)는 제우스(Zeus) 신에게 유인(誘因)을 당하였다. 아소포스는 딸이 없어진 것을 알고 놀라서 시지프에게 호소한다. 이 사건을 알고 있던 시지프는 코린트(Cprinth) 성(城)에 물을 공급받는다는 조건으로 이 사실을 아소포스에게 말해준다. 하늘의 진노(震怒)인 벼락보다 물의 은총(恩寵)을 시지프는 택한 것이다. 이 까닭에 그는 지옥에서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또 호머는 시지프가 사신(死神)을 쇠사슬에 얽어맸다는 이야기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제우스의 연인으로 저승의 신 풀루토(Pluto)는 제 세상, 저승이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고요해진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쟁의 신 아레스(Ares)를 급히 파견, 사신을 시지프의 손에서 해방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임종(臨終)이 가까웠을 때 시지프는 그의 처의 사랑을 시험해 보려고 자기 시체를 땅에 묻지 말고 광장 복판에 팽개쳐 두라고 처에게 일렀다. 시지프는 지옥에 떨어진다. 인간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먼 처의 복종에 화가 난 시지프는 처를 골려주기 위해 다시 한번, 이 지상으로 돌아올 허가를 풀루토에게서 얻는다.
 
그러나 재차 이 세상에 돌아와 세상 풍경을 보고 햇볕에 탄 돌과 바다의 맛을 보자 그는 저승의 어둠 속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진다. 소환도 경고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로부터 긴 세월을 그는 하구(河口)의 만경창파(萬頃滄波), 찬란한 바다, 대지(大地)의 미소(微笑)를 즐기며 살아간다. 신들은 그를 체포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우스의 아들로 제신의 사자인 오르코스(Orkos)가 와서 이 대담한 사나이 시지프의 목덜미를 잡고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간 것이다. 지옥에는 이미 그를 위한 바위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만하면 시지프가 부조리(不條理)의 영웅임을 알 수 있으리라. 그의 고뇌(苦惱)뿐만 아니라 그의 정열로 인해 그는 부조리의 영웅이 된 것이다. 신들에 대한 그의 도전(挑戰), 죽음에 대한 그의 반발(反撥), 생명에 대한 그의 애착(愛着)과 열정(熱情)이 결단코 성취될 수 없는 일에 그의 온 힘과 전(全) 존재(存在)를 다 바쳐 일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이 절망적(絶望的)인 형벌을 그에게 초래한 것이다.
 
지옥에서의 시지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본래 신화란 인간의 상상력이 그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리라. 우리들에게는 다만 시지프가 저 거대한 돌을 밀어 올려 굴리는 그의 혼신(渾身)의 노력이 보일 뿐이다. 긴장한 그의 얼굴, 돌에 밀착된 그의 뺨과 진흙에 뒤덮인 바윗돌을 지탱하는 그의 어깨, 돌과 한 덩어리가 된 몸을 바치고 선 그의 두 다리, 흙투성이가 된 그의 두 손으로 굳게 잡아 쥔 너무도 인간적인 정확성과 집착력이 우리에게 보일 뿐이다.
 
도달할 하늘이 없는 공간과 끝나는 날이 없는 시간 속에서 계속되는 이 길고 한없는 노력 끝에 일견(一見) 목적이 달성된다. 그러자 어느새 돌은 순식간에 하계(下界/下溪)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시지프는 보고 있다. 하계로부터 또다시, 기백 번, 기천 번째 그 돌을 그는 산꼭대기로 올려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다시 들로 내려간다.
 
이 하산(下山), 이 휴식(休息),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시지프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기진(氣盡) 역진(力盡)하여 돌 가까이 가는 그의 얼굴은 돌 그 자체이다. 무거우나 틀림없는 발걸음으로, 끝을 알 수 없는 고뇌의 발걸음으로 그는 산을 내려간다. 이를테면 호흡작용처럼 그의 불행이 반복되는 이 순간, 이것은 의식을 되찾는 순간이다.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거처로 내려가는 이때 시지프는 순간마다 그의 운명 아니 숙명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숙명의 바위보다 굳세다.
 
이 신화(神話)가 비극적인 것은 그 주인공의 의식이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성공한다는 희망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를 떠밀고 있다면 그는 어떤 어려움도 감수(甘受),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의 노동자는 매일 같은 일에 종사하고, 그의 운명은 시지프의 것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가 비참해지는 것은 그의 의식이 눈을 뜨는 희귀(稀貴)한 순간뿐이다.
 
신들의 프롤레타리아요, 무력(無力)하면서도 반항(反抗)하는 시지프는 자신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全貌)를 알고 있다. 산을 내려오면서 그가 줄곧 생각하는 것은 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의식하는 그의 인식(認識)이 그의 승리(勝利)를 완벽하게 한다. 모멸(侮蔑)함으로써 극복할 수 없는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으리라.
 
날마다 시지프의 하산은 고통스러운 자학(自虐)의 행로이지만 그것은 또한 환희(歡喜)에 찬 자족(自足)의 행로일 수가 있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리라. 시지프가 그 바위로 돌아온 장면을 상상해 보자. 고통은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다. 이 대지의 아름다운 광경이 너무나 기억에 생생할 때, 행복을 갈망하는 부르짖음이 너무나 격렬할 때, 너무나 비통(悲痛)한 비애(悲哀)가 인간의 가슴을 채운다.
 
이것이 바위의 승리요, 바위 그 자체다. 끝없는 고통과 한없는 비애란 인간으로서 감당못할 일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겟네마네의 밤이다. 그러나 사람을 짓눌러 버리는 진리는 인간이 이 진리를 인식할 때 소멸(消滅)한다. 에디푸스왕(Oedipus Rex)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에디푸스는 그가 그의 숙명을 알게 되는 때부터 그의 비극이 시작된다.
 
그러나 숙명을 알게 된 바로 그 순간, 눈이 멀고 절망한 에디푸스는 이 세상에 자신을 비끄러매는 유일한 끈은 생기 넘치는 젊은 딸의 팔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이때 경이적(驚異的)인 말이 들린다.
 
“이와 같이 많은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不拘)하고 나의 노령(老齡)과 내 영혼의 위대함은 나로 하여금 판단케 한다. 모든 것은 다 좋다고…”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 극작가 소포클레스(Sophocles 기원전 497-406)의 에디푸스(Oedipus)는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Fyodor Doestoevsky 1821-1881)의 작품 ‘죄와 벌(Crime and Punishment)’에 나오는 스비드리가이로프(Svidrigailov)와 같은 표현으로 이같이 부조리를 포용한다. 고대의 예지(銳智/叡智 /豫知)가 현대의 영웅주의(英雄主義)와 결부된다.
 
부조리를 발견한 자는, 누구나 행복에 이르는 안내서 같은 것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리라. ‘뭐라고? 그렇게 좁은 길을 가지 않고는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그러나 세계는 하나밖에 없다. 행복과 부조리는 동일한 대지에 태어난 쌍태아이다. 우주의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그렇듯이.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다. 물론 행복은 반드시 부조리의 발견에서 생긴다고 한다면 잘못이리라. 행복에서 부조리의 감성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모든 것은 다 좋다고 나는 판단한다.’
 
이렇게 에디푸스는 말한다. 이 말은 숭고하다. 이 말은 인간의 잔인하고 무정한 우주 속에 쩡쩡 울린다. 이 말은 모든 것이 과거에 다한 일 없고, 현재도 다하지 않으며, 미래에도 다하지 않을 것임을 알려 준다. 이 말은 온갖 불행과 고통을 갖고 이 세계에 들어온 신들을 이 세계로부터 쫓아낸다. 이 말은 인간의 운명은 인간이 풀어야 할 일, 인간의 문제, 인간의 수수께끼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에
시지프의 남모를 기쁨이 있다.
시지프의 운명은 시지프의 것이다.
시지프의 바위는 시지프의 것이다.
 
이와 같은 부조리의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偶像)을 침묵시킨다. 별안간 그 본래의 침묵으로 돌아온 우주 한가운데서 수많은 감탄(感歎)의 탄성(歎聲)이 대지로부터 솟아오른다.

 

그림자 없는 빛은 없다. 밤을 알지 않으면 낮도 알 수 없다. 부조리의 인간은 ‘oui’라고 힘 있게 말한다. 그리고 끝이 없는 그의 노력은 또다시 계속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각자 제 운명이 따로 있을지라도 인간을 초월한 운명이란 없다. 그 같은 운명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요. 그 같은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 같은 운명은 경멸하고 무시해야 한다고 사람은 판단한다.


그 이외의 운명에 대해서는 자기가 자신의 일상적 운명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인간은 알고 있다. 인간이 그의 삶으로 돌아오는 이 엄숙한 순간 그 바위로 돌아온 시지프는 가볍게 바위를 굴려 다시 산꼭대기를 향하면서 이 행위의 연속을 응시한다. 이 행위의 연속이 그의 운명이 되는 것이고 이 운명은
그 자신에 의하여 창조되며 그의 죽음으로 봉인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만사는 모조리 인간에 기원한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는 끊임없이 줄곧 걷는다. 바위는 여전히 굴러간다. 나는 시지프를 산기슭에 놓아둔다. 사람은 언제나 반복해서 자기의 무거운 짐을 발견한다. 시지프는 신들을 부인하고 바위를 들어올리는 고귀한 성실을 가르친다. 시지프도 모든 것은 다 좋다고 판단한다.
 

이미 주인 없는 이 우주는 그에게 불모(不毛)의 땅도 황야도 아니다. 돌멩이 하나하나 깊은 밤 이 산의 금속성 광휘(光輝) 하나하나는 그에게 한 개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를 향하는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우리 모두 행복한 시지프를 그려보리라. 하지만 이 시지프의 행로가 참으로 보람되고 행복한 것이 되려면 시지프 자신이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임을 어서 깨달아야 하리라.
 
“아무도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다. Nobody knows everything about anything.”
 
이는 폴란드계 미국인 알프레드 코집스키가 1933년 창시한 그의 ‘일반 의미론(General Semantics)’의 근본 원리(根本原理)이다. 이를 달리 풀이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그 무엇, 그 누구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다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리라. In other words: “We cannot imagine, think, say, understand, know all about anything or anyone-including ourselves.”
 
단순한 구도(求道) 소설의 한계를 넘어 이 시대의 장경(藏經)으로 ‘내가 곧 부처’라는 진리를 만나게 하는 인간주의 문학의 소설이라고 평가받는 최인호(1945-2013) 작가의 ‘길 없는 길 1-4’ 은 인간부처 자유인 경허 스님 이야기이다.
 
‘길 없는 길’(The Way Without A Way) is a four-volume narrative written by South Korean writer Choi In-ho(1945-2013) about the life journey of the famous Korean Buddhist Seeker 경허(Gyunghuh 1849-1912).
 
우리 모두 우주 나그네 길손 코스미안으로서 우리가 가는 길이 이처럼 ‘길 없는 길’인 우주역정(宇宙歷程) 미지(未知)의 행로(行路)이고 우리 모든 각자의 삶 자체가 신화(神話)가 아닌 인화(人話), 곧 우화(宇話)이리.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작성 2023.10.14 11:04 수정 2023.10.1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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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