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석 칼럼] 참새에 대한 유감

허석

삭발한 여승처럼 파르스름한 하늘이다. 들판을 가로질러 삽상한 바람이 흔연하고, 산언저리마다 노을빛 계절이 완연하다. 코스모스 꽃대가 흔들릴 때마다 고추잠자리는 덩달아 허공을 오르내린다. 지둥 치듯 울어대던 개구리 소리도 계절이 바뀌자 어느새 잠잠해졌다. 하나둘 꽃 진 자리에 슬픔처럼 열매가 맺히는 동안 그늘도 푸르게 나눠 먹고 자라던 들풀들도 시름시름 힘을 잃어간다. 바닥으로 구르는 가랑잎 몇 장이 강 건너 저 산을 조만간 만산홍엽으로 끌고 갈 모양이다.
 

 시골집이다. 빗살무늬 싸리비 지나간 마당에 하얀 쌀알들이 닭 모이 주듯 흩뿌려져 있다. 싸목싸목 내려앉은 겨울날 싸락눈 같다. 며칠째 그 모양 그대로다. 밤새 달빛과 이슬에 쌀알이 퉁퉁 불어 터졌다. 다른 때 같으면 쌀알들을 뿌려주자마자 참새들이 달려들어 주워 먹었을 텐데 요즘 들어 새들이 오지 않는다.
 

겨울이나 봄철이면 유달리 많은 참새가 집 주위를 넘나들었다. 때로는 직박구리나 오목눈이도 지나가는 길손처럼 같이 합세할 때도 있었다. 산자락 깊숙이 내려앉은 안개가 채 가시기도 전부터 집 주변의 지붕이나 대나무 가지, 바지랑대 받친 빨랫줄에 수십 마리가 모여들어 이른 아침을 열었다. 겨울철이라 먹이가 없어 사람 사는 집을 기웃거리는 모양이었다. 안쓰럽기도 하고 새소리가 정겹기도 해서 쌀 한 움큼 내다 마당에 던져주면 여기저기서 댓잎 구르듯 달려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매일 몇 차례 쌀알을 내다 주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참새들이 모이를 먹는 모습이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친구들을 불러오는 것인지 자기네들끼리 짹짹거리며 들락날락 한꺼번에 몰려다닌다. 그 작은 부리를 콕콕 찔러대며 좌회전 우회전 종종거리며 여기저기 흩어진 쌀알을 바지런히 집어먹는다. 그러다가 무슨 소리라도 들었는지 한꺼번에 ‘파르르’ 날아올라 도망을 갔다가 또 한꺼번에 ‘화르르’ 마당으로 내려앉는다. 마치 바람의 품에서 품으로 옮겨 다니는 것 같다. 세상살이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작고 여린 것들은 아마도 그들에게만 들리는 위험 신호가 있나 보다. 
 

가만히 보니 참새들도 각자의 개성과 습성이 있는 것 같다. 무슨 소리가 나면 빠짐없이 모두 날아 도망가나 했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중 한두 마리가 남아 무슨 일이 있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 날지도 않고 혼자 멀뚱거리고 있다. 둔해서인지, 겁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해도 세상살이에 꼭 엉뚱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라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그게 재미있어 숨죽여 지켜보다가 모자란 것 같으면 또 한 줌 내다가 던져주곤 했다.
 

그러던 참새가 여름께부터 보이지 않는다. 마당에 쌀알을 뿌려놓아도 어쩌다 비둘기 한두 마리가 길 잃은 철새처럼 들리기만 할 뿐 참새떼는 아예 구경할 수가 없다. 다른 곳으로 집단이주라도 했는지, 아니면 집주인에게 무슨 섭섭한 감정이라도 있어 발길을 끊었는지 의아심이 일기도 한다.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았다. 바야흐로 만물이 수확의 계절인 이 가을에 먹을 게 풍성해져서인 모양이다. 들판에 나가면 맛있는 햅쌀도 지천이고 산모롱이마다 풀씨나 작은 열매 같은 별미도 수두룩하다. 굳이 위험한 사람 근처에 기웃거릴 이유가 없어진 모양이다. 세상 이치를 수긍하면서도 마음 빈자리가 허우룩하다. 
 

먹을 것이 흔하다 보니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도 작용한 것일까.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인간 세상과 천상을 연결해준다고 ‘새’라고 한다는데 그 기회주의적 경박함에 내심 서운하기 이를 데 없다. 지네들 보릿고개 시절에 일삼아 양식을 꺼내준 은혜도 몰라보고 살만하니까 모르는 체한다는 섭섭함, 내게서 등을 돌렸다는 배신감이 생뚱맞게 스쳐 간다. 새들의 유전자는 오직 먹이활동에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퉁퉁 불어 터진 채로 마당에 흩어져 있는 쌀알을 볼 때마다 그 외면당한 기분에 혼자서 하루가 콩팔칠팔 이다.
 

세상에 쉬운 삶은 없었다. 울퉁불퉁한 인생길에 누구네 든 알게 모르게 주위의 도움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물이나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 듯 선뜻 스쳐 간 인연이라도 따져보면 고맙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자식 앞에 헌신한 부모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때그때 삶의 고비마다 같이 아파하고 같이 힘들어하며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하로동선(夏爐冬扇)처럼, 배부르게 되면 배곯았던 시절 누군가의 수고를 오래 기억하지 못하는 법인가 보다. 남에게 도움을 받고 은혜를 입었을 때는 평생을 잊지 않을 것처럼 고마워하면서도 막상 시간이 지나고 장소가 바뀌면 흐지부지되어버린다. 마음은 항상 있지만 세상 살기가 바빠서라는 핑계가 살아가는 처세며 변명이 아니었던가 싶다. 자기가 아쉽고 다급할 때는 관심을 보이다가 필요하지 않으면 금방 무심해지는 것 또한 매사에 이해관계가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남에게 작은 도움을 베푼 일은 잘도 기억하는 것 같다. 채무자보다 채권자가 더 기억력이 좋은 셈이다. 옛말에 자식에게 효도를 따지기 전에 내가 부모에게 제대로 봉양하고 있는지, 부하에게 충성을 따지기 전에 상사에게 제대로 대접하고 있는지 나 자신부터 돌아보라고 했다. 자기도 행하지 못하면서 남만 지적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긴 하다. 의식이 있는 존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게 붙들고 있는 것도 나의 마음이다. 이유와 까닭이 있건, 심성이건 현실이건 변한 것은 내 마음이지 다른 누구의 마음도 아니다. 평생 변하지 않은 우정, 사랑, 신앙이 있었다면 그 또한 내 마음이 훌륭해서이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이나 선택에 의해서라기보다 우직하면서도 지고지순한 내 마음이 먼저일 것 같다.
 

참새를 두고 서운해하고 공치사를 따지는 것은 내 입장이다. 안타까워 도와준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뭔가 반대급부를 바랐던 조건부 선심이었던 모양이다. 모이를 주는 것이 그들을 위한 선행인지 참새들이 알 리 없고, 안다고 해도 미물에게 보은 여부를 따질 수는 없는 일이다. 모이를 줄 때 참새들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던 만큼 그것으로 보답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곧 겨울이다. 새들이나 산짐승들에게 배고픈 계절이 돌아온다. 겨울이 되어 또 참새들이 마당으로 몰려오면 이제 어떻게 할까 싶다. 답이 따로 있을까. 올겨울 빙판길에, 누군가 내 앞에서 벌러덩 넘어지면 얼른 손을 내밀어 부축해야 할까, 아니면 도움을 보상받을 보장이 없으니 외면하고 지나쳐야 할까.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3.10.17 09:23 수정 2023.10.1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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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