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선소감]
우선 큰 상을 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보름 정도 동안 생전 써보지도 않았던 인문 칼럼을 써보겠다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던 것에 대한 보답이 되고도 남는 것 같습니다. 쓰면서도 이건 너무 교과서적인 작법이라는 둥, 유연하지 못하다는 둥, 대학생 레포트 같다는 둥의 촌철살인적인 비평을 아끼지 않은 지인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조금 더 나은, 조금 더 울림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5회 코스미안상 은상] 침묵 속에서 이야기하는 법
미국의 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사회적 약속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어 설명한다. 한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리러 올 때 지각하는 부모들에게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 늦은 시간만큼 벌금을 부과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부모들이 벌금을 내기 싫어서라도 더 빨리 아이들을 데리러 올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벌금 제도의 시작과 함께 지각하는 부모들의 숫자는 그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이내 제도를 시행하기 전보다도 훨씬 더 많은 부모들이 지각을 당연시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돈을 지불할 테니 아이들을 좀 더 돌봐달라며 당당하게 요구하는 부모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가급적 아이를 빨리 데려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의 무게감이 금전이라는 물질적 가치로 대체되자, 부모들은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지지 않게 된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가치는 국가와 민족마다 상이하게 갈렸다. 어떤 부족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어떤 사회는 돈과 재물로, 어떤 국가는 지엄한 법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그토록 복잡하고 다양한 공동체들이 하나같이 중요시했던 가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윤리나 규범, 배려와 양보의 미덕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었다. 윤리는 구성원들이 공동체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고의 기반을 다졌고, 규범은 윤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구성원들 사이의 풍습 등의 형태로 보급되었으며, 배려와 양보의 미덕은 이웃간의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법이나 권력, 재물만큼이나 공동체의 토대를 지탱하는 힘을 가진 건 구성원들 사이의 사회적 신뢰와 암묵적인 약속이었던 것이다.
사회적 신뢰와 암묵적 약속이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은 현대사회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하버드 대학교 타룬 칸나(Tarun Khanna) 교수는 ‘신뢰받는 사회적 제도(trusted institutions)’가 사람들의 일상을 예측 가능하고 단순하게 만들어주며,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협력이 일어날 수 있게 해준다고 강조한다. 반대로 사회적 신뢰의 소멸은 사람들로 하여금 법과 규칙을 지키지 않게 만들고, 나와 다른 의견에 관용적이게 못하며 사회구성원 간의 상부상조를 줄어들게 만든다. 이러한 칸나 교수의 주장은 사회 제도적 신뢰는 곧 한 사회의 혁신성과 효율성, 창의성의 발현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요소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근래 들어 우리 사회는 사회적 신뢰, 그리고 암묵적인 약속의 중요성을 경시하다 못해 아예 망각해버린 건 아닌가 싶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 법을 신뢰하지도 못하고, 제도에 대한 효용감을 느끼지 못하며, 구성원 개개인의 목소리가 한없이 무기력하다고 느끼는 탓에 민의의 표현와 투표를 기피한다. 뉴스와 SNS상에서는 선동적인 정치 구호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식만이 울려 퍼지고, 앞다투어 편가르기를 조장하며 상대편에 대한 무차별적 혐오와 비난을 양산한다. 거기에 경쟁주의적인 사회 분위기는 내 옆에 선 사람이 이웃이나 사회구성원이 아니라 경쟁자이자 적이라고 느끼게끔 만든다. 결국 내가 발을 딛고 선 이 나라, 이 사회에서 ‘우리’라는 수식어는 사라지고 만다.
문제는 이와 같은 작금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대처방식이 전부 법과 제도 같은 명시적 방안에만 치우쳐져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풍조는 최근 들어 이슈화된 교권 회복 촉구 시위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부분의 언론과 기사들은 사태의 원인을 아동복지법과 교육법의 문제점과 교육 현장의 행정적 미비점에 대해서만 지적할 뿐, 사태의 기저에 깔린 우리 사회의 세태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는다.
경쟁 과열 기조와 학벌만능주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적을 잘 받아야 하고, 어느 대학에 내더라도 손색없는 학생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학부모와 학생의 강박이 교사의 직책을 도구로 전락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인식이 교육 현장의 실무자인 교사를 경시하는 분위기로 이어진 것 아닌가. 그런데도 세간의 인식과 목소리들은 교사 시위에서 불거진 모종의 법적, 제도적 문제들만 해결하면 교육 현장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이 저절로 회복되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마치 사회 시스템이 조각 몇 개만 더 끼워 넣으면 저절로 그림이 맞춰지는 퍼즐이라도 된다는 듯 안일하고 편의주의적인 착각에 빠져있는 꼴이다.
아무리 치밀하게 조직된 법안이라도, 아무리 확실하게 구성된 지침이라도 우리 사회의 비가시적인 부분의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는 한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법과 제도의 보완 같은 명시적인 방법으로 당장의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만 같은 임시방편책일 뿐이다. 우리 사회 기저에 깔린 분위기와 시민들의 인식이 개선되지 않는 이상,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 해결은 기대할 수 없다고 봐야 한다.
한 사람이 단순한 글귀 몇 자로 요약되고 정리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있는 이 사회 또한 몇 개의 법과 제도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공동체가 명시적인 규칙들과 묵시적인 약속들이 적절하게 조합되어 존속되는 것이라면, 사회의 문제나 병폐를 해결하는 방법론 또한 명시론적 방식과 묵시론적 방식, 두 가지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그러니 법과 제도의 맹점에 대해 소리높여 비판하고 적극적으로 개선점을 찾아내려는 노력만큼이나, 암묵적인 신뢰와 약속의 기능을 회복하려는 시도 또한 더없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 뚜렷하게 증명될 수 있는 것, 정확하게 환산할 수 있는 것에만 집착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더욱 명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법과 제도의 맹점들뿐만이 아니라 손상된 사회적 약속의 가치 또한 회복되어야 함을. 당장의 효과를 위해 한쪽으로만 치우쳐진 대처방식만 답습하는 것은 마치 곪은 상처처럼 다시금 불거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침묵 속에서 존중을, 신뢰를, 약속과 상식들을 다시금 이야기할 수 있게 될 때, 우리 사회는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