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선소감]
항상 노력하는 부분이지만,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려 한다. 이번 작업도 마찬가지로 과정에 집중하기 위해 나름 공을 들였고, 그 과정에서 나와 좀 더 가까워지는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나에겐 이것이 가장 큰 수확이 아니었나 싶다. 코스미안뉴스에 깊은 감사를 전한다.
[제5회 코스미안상 은상] 우리는 외모의 개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외모는 시대와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 코드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외모만큼 한 개인의 능력이나 경쟁력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도 없으며, 사람들 간의 소통의 화두인 것도 없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외모를 개선하거나 향상시킬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지불하고자 한다. 이미 성형 수술을 받은 ‘과거완료형’의 사람들뿐 아니라 아직 몸에 손을 대지 않은 ‘미래잠재형’의 사람들도 기회만 있다면 자신의 외형을 새롭게 바꾸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왜 외모적 변신(變身)을 시도하는가. 그리고 심지어는 왜 그것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는가. 우선 외모에 대한 정의가 달라졌다는 데 한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예전 같으면 외모는 그저 ‘타인과 차별화된 예쁜 얼굴과 멋진 몸매’ 식의 1차원적이고 단순한 공식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외모라는 단어는 신체에 한정된 기본적인 해석 외에 더 넓은 사회학적 틀을 적용받고 있다. 즉, 그것은 ‘사회에서 갖춰야 하는 능력 중 하나’가 된 것.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은 돈이나 명예 등 권력과 결부된 개념이 됐다. 한껏 뽐내기 위한 취미의 영역이 자기 과시라는 요소를 넘어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영역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외모는 이러한 사회학적인 틀에 더해 경제학적인 틀도 적용받게 됐다. 외모를 개선하고 업그레이드하겠다는 의지가 투철한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외모와 관련된 희소성의 원칙은 깨지고 있으며, 시장의 지각 변동도 눈에 띌 정도로 확연하다. 뛰어난 외모를 갖춘 사람과 연관된 시장이 과거 독점이었다면, 현재는 철저히 완전경쟁에 근접해 있다. 과거에는 ‘불친절한’ 얼굴과 몸매를 갖고 있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얼굴과 몸매를 갖고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라도 하루아침에 변신을 시도할 수 있게 됐고, 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라는 제약 따위는 전혀 없다. 오히려 여기저기서 시샘과 질투를 한 몸에 받는다. 불가능성의 영역이 가능성의 영역으로 진입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반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진입장벽이 낮거나 전혀 없다는 완전경쟁 논리의 본질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현재의 가능성은 예전의 불가능성보다 더 큰 역효과를 불러온 건지도 모른다. 불행한 건,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한 외모와 몸매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차별성이나 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누군가와 똑같은 눈매를 소유하게 됐든 또 다른 누군가와 똑같은 코를 소유하게 됐든, 중요한 건 본인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끌리게 된다는 것을, 아니 최소한 눈여겨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일종의 의식적 최면술처럼 보이는 이러한 시선의 권력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하나의 유행 품목처럼 남과 동일해 보인다는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외모적 변신을 시도하고자 하는 셈이 된다. 왜 그런 것일까. 앞서 경제학적인 틀과 사회학적인 틀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것은 둘 다 ‘달성 가능’하다는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 즉, 노력만 한다면 누구라도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대상을 성취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목표를 달성한 후에도 무언가 허전하다는 심리가 남게 된다. 욕구가 달성되는 순간 찾아오는 만족감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고, 실제로 우리는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욕망의 문제다.
욕망은 영원히 달성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는 성형을 많이 해서 톱스타의 얼굴을 가질 수는 있지만, 톱스타 본인이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형을 한 결과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살 수는 있지만, 그들로 하여금 질투라는 마음을 영원히 갖게끔 할 수는 없다. 추론컨대 외모와 관련된 변신은 욕구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욕망과 관련돼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욕망이 타인을 중심축에 두고 있는 반면 주체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실제로 타인이 설정해놓은 기준에 판단의 토대를 두고 있고, 타인의 시각과 관점을 중심으로 스스로를 제어하고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뒤집어서 적극적으로 풀이해보면, 우리가 변신을 원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그만큼 간절하게 타인과 소통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태껏 외모적 변신은 상업적인 관점과 더불어 전반적으로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하지만 그것이 지향돼야 할지 지양돼야 할지가 우리의 관심사여서는 안 된다. 외모에 시간과 비용 등의 노력을 투자한다는 것은 타인의 눈을 의식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사회의 주류적 흐름을 따라가겠다는 동일화에의 의식과 의지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진정 관심을 두고 초점을 둬야 하는 것은 외모에 대한 관점의 주체적 전환이다.
외모의 개선은 사회적 트렌드와 부합하고자 하는,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의 반영이고 노력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해석 밑바닥에는 주체가 반드시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능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것,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거둬들이려는 마음, 그리고 더불어 타인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 따지고 보면 이것은 모두 자아(自我), 즉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얘기다. 자신이 진정 원해서 하는 것과 사회가 인정해서 하게 되는 것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