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처 음식점에서 점심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무심코 길가 쪽으로 눈길을 주는 순간, 담벼락에 붙은 하얀 종이쪽지 하나가 와락 시선을 끌어당겼다.
“이곳에 쓰레기 버리는 인간은 인간쓰레기다”
‘쓰레기 버리는 인간’과 ‘인간쓰레기’, 낱말들의 자리를 앞뒤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강한 주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촌철살인의 기발한 발상에 탁 무릎이 쳐졌다. 얼마나 부아가 치밀었으면 이처럼 칼날 같은 낱말들을 갖고 왔을까.
모르긴 몰라도, 글귀의 주인은 평소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쓰레기를 갖다버리는 양심 불량자들 때문에 여간 골머리를 썩여 오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벽보로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기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갖은 수단, 오만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으리라. 그럼에도 오불관언吾不關焉, 도무지 쇠귀에 경 읽기였던 모양이다. 그 심정 백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돌아서서 찬찬히 헤아려 보니 조금 걸러진 표현을 쓸 수는 없었을까, 아쉬운 마음이 고개를 든다. 한편으론 오죽했으면 싶은 동정심이 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아무리 그렇지만 예의 종이쪽지 속 글귀는 너무 지나친 것 같아 거부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쓰레기를 무단 투기한 당사자가 그 저주에 찬 벽보를 발견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리 속담에 뭐 뀐 놈이 성낸다고, 마땅히 손가락질받을 만한 스스로의 행위는 돌아볼 생각을 않고 도리어 목에 핏대를 세울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쓰레기라며 독한 말을 내뱉는 네놈이야말로 정작 쓰레기인간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양쪽 다 어지간한 위인들이겠거니 싶다. 서로가 그 나물에 그 밥인 셈 아니겠는가.
저주는 본시 보복의 속성을 지녔다. 남에게 저주를 퍼부으면 그것이 거꾸로 저주의 독화살이 되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담벼락의 글귀를 만나는 순간, 여러 해 전부터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는 문젯거리 하나가 또다시 불쑥 고개를 든다.
걸핏하면 폐비닐이며 플라스틱 같은 유해 물질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소각하는 동네 사람 몇몇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 왔다. 코의 점막을 자극하는 역한 냄새도 냄새려니와, 무엇보다 환경호르몬인 다이옥신이 나와서 인체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고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는 인간은 인간쓰레기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예의 그 글귀에 뒤통수가 근질거린다. ‘담배 사 피우고 술 사 마시는 돈은 아깝지 않고 고작 몇 푼 안 하는 쓰레기봉투 구입하는 돈은 아까워서 생활쓰레기를 마구잡이로 태워버리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 마음속으로 이렇게 가시 돋친 독설을 쏘아 대었던 지난 시간들이 뉘우쳐진다.
말은 인격의 잣대가 된다고 했던가. 자기가 뱉은 말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와서 스스로의 인격을 갉아먹는다.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당신이 쓰레기 취급받습니다.” 이 정도 수위의 표현이었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문득 옛날이야기 한 토막이 뇌리를 스친다.
조선 시대 때, 성이 박 씨라는 것만 알려진 나이 지긋한 백정이 장터에서 푸줏간을 열고 있었다. 어느 날 젊은 양반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시간에 박 씨의 가게로 고기를 사러 왔다. 그중 한 양반은 “어이, 여기 고기 한 근”하고 퉁명스런 어투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그 시대는 백정이라면 천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층이 아니었던가. 그래, 백정이라며 얕잡아보고 그렇게 반말을 한 것이다. 반면에 다른 한 양반은 “박 서방, 나도 고기 한 근 주시게”라며 살가운 목소리로 주문을 넣었다. 비록 천민 신분이긴 하지만 연만한 어른한테 함부로 하대를 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이 건네받은 고기의 양은 근 배 가까이나 차이가 났다. 다만 출신이 낮을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배알까지 없으란 법은 없지 않은가. 자기를 대접해 주는 점잖은 양반에게 박 씨의 마음이 더 갔던 건 인지상정이리라. 먼저 온 양반이 추궁하듯 따져 물었다. 상것 주제에 사람 두고 차별을 한다 싶어 고깝게 여겨졌던 게다.
“야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도 왜 저 사람 고기는 저렇게 많고 내 고기는 이렇게 적으냐?”
그 다그침에 백정은 난감한 상황을 기발한 대답으로 비켜 간다.
“예, 그야 손님 고기는 ‘어이’가 자른 것이고 저 어르신 고기는 ‘박 서방’이 자른 것이니까요.”
거드름 피우는 양반을 향해서 던진 백정의 통쾌한 응수에 세상사로 찌든 가슴속 체증이 시원스럽게 뚫리는 기분이다. 일본의 어느 작가는 지극히 무심해 보이는 물조차도 자신을 나쁘게 말하는 소리를 들려주면 결정이 일그러진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주장을 펼치지 않았던가. 비록 무정물일지라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에게 있어서이랴.
한 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게도 하고 서로 원수 사이로 만들기도 한다. 한 줄 글귀가 멀쩡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사지에 내몰린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내가 남을 위해 줄 때 남도 나를 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무릇 모든 사람의 의식의 밑바닥에는 타인에게 존중받고 싶은 열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감정을 자극하면 반감을 사게 되지만, 감성에 호소하면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명령조나 지시형보다는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어?’ ‘저렇게 하는 것이 좋을 성싶은데’ 하는 청유형 내지는 권면형이 훨씬 더 설득력이 크다는 사실을, 지난날 아이들을 키우면서 알았다.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문수사리보살님의 게송을 염송하노라니, 스스로의 지난날들이 돌아다보여서 새삼 낯이 화끈거려 온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