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그에게서 우아한 답변을 들었다. 정답이 아닌 삶의 표현을 들은 나는 그의 깨달음에 깊이 스며들었다. 그렇다. 깨달은 사람들은 항상 친절했고 예의 있고 무례하지 않았다. 그의 글 속에서 나는 길을 잃지 않고 천천히 사유의 숲을 거닐 수 있었다. 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도,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는 고통을 겪을 때도 그는 항상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삶에 지쳐 방황할 때 그는 끔찍한 소리가 들리는 철학 대신 구원의 무기인 지혜를 알려주었다. 어리석은 사람과 인연을 끊지 못해 괴로워할 때 그는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함께 하십시오. 그러나 너무 가까이하지는 마십시오”
그를 알게 된 건 아주 오래전 일이다. 내 젊음이 햇살처럼 반짝거리던 시절 그는 나에게 연인처럼 다가왔다. 독재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던 시절 그의 시는 구원이었다. 시궁창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친절하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그래서 그를 사랑했다.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감을 느끼며 개인의 존재는 사라진 군중 속에서 불행한 짐승으로 살아가던 나에게 그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지 말라며 지혜의 시를 던져 주었다. 나는 내가 사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그에게 의존했다. 한 편의 시에는 위안과 평화가 살아있다는 걸 그를 통해 깨달았다. 그는 나의 정신적 스승 칼릴 지브란이다. 그는 내게 나직이 말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그대들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두지는 말라.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 자랄 수 없느니.
우리는 서로 멀어질까 봐 쩔쩔매고,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안간힘 쓴다. 구속하지 못해 스토킹하고 사랑받지 못하면 죽을 것처럼 안절부절못한다. 사랑을 받아야 비로소 안심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사랑이 식으면 사랑을 사기 위해 영혼까지 판다. 타인에게서 멀어지면 생존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제 생존은 각자도생으로도 가능한 시대인데 말이다. 그런 우리에게 칼릴 지브란은 충고한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고 사랑하되 구속하지 말라고 한다. ‘나’라는 개체의 완전성에 대해 쉽고 명확하게 일깨워준다. ‘나’의 완전성을 인식하면 사랑은 존재의 상태가 된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한 사람을 통해 전체를 사랑할 수 있는 전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지극하고 섬세한 깨달음은 칼릴 지브란이 우리에게 주는 사랑이다.
예언자의 도시 레바논은 칼릴 지브란이 태어난 곳이다. 예수가 태어난 곳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1883년에 태어난 칼릴 지브란은 터키의 폭정과 가난에 시달리다가 아버지만 레바논에 남기고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하지만 2년 후 혼자 레바논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을 여행하면서 삶이 무엇인지 사람이란 또 무엇인지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에 깊이 천착하면서 철학자로 화가로 시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칼릴 지브란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20년간 구상하면서 완성한 산문시 ‘예언자’를 영어로 출판했다.
나는 예언자를 읽으며 방황하는 청춘을 보냈고 흔들리는 중년도 보냈다. 정신적 위기에 부딪힐 때마다 예언자의 시구 하나하나가 나를 섬세하고 명쾌하게 위로해 주었다. 난 기억한다. 인간의 본질은 전쟁과 다툼 같은 갈등이지만 인간의 본성은 사랑이다. 본질을 넘어 본성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 ‘예언자’는 그래서 특별하게 애착한다. 칼릴 지브란이 평화와 화합을 주장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철학자로 화가로 소설가로 그리고 시인으로 살아가는 길은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 길인가. 그는 결혼도 하지 못 한 채 독신으로 살았다. 술이 그의 친구였고 고독이 그의 영혼이었다. 그렇게 행려병자처럼 뉴욕의 어느 허름한 병원에서 48세로 생을 마감한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 자랄 수 없느니’ 지금도 누군가는 이 구절을 읽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힘을 얻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인생의 지침을 삼아 인간관계를 정립하고 있을 것이다.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 자랄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이 온전히 자신의 세계를 갖고 완전한 사람으로 거듭나려면 참나무와 삼나무처럼 서로의 그늘을 벗어나야 한다는 지혜의 말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종교를 벗고 사상도 벗고 인종도 벗어 오로지 지혜만 전해주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는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데 등불이 되어준다. 그 등불은 너무 밝지도 않고 너무 어둡지도 않은 평온하고 고요로운 등불이다. 이런 등불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사노라면 파도도 무섭지 않고 폭풍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험난한 세상의 바다를 건너며 두 손에 꽉 쥐고 놓치지 말아야 한다. 언제 큰 파도가 칠지, 언제 폭풍이 몰려올지 모르니까.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