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해 온 수백만 년의 시간 이래, 역사상 이러한 분리를 겪은 적은 없었다. 이전까지 인류는 노동과 휴식의 명확한 경계를 두지 않고 살아왔다. 노동이 곧 휴식이 될 수 있고, 삶이 곧 노동을 통해 성립해왔다. 일상 속에서 행해지는 노동은 곧 우리의 살림살이와 직결되는 노동이었다. 예컨대 밥을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지으며, 농사를 짓는 식이었다. 그렇게 인류는 스스로의 삶을 직접 지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모양새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산업혁명과 맞물린 헨리 포드 식 대량생산은 근대 자본주의의 서막을 알렸고, 이전까지 인간으로서 삶을 지속해 나가기 위한 재생산 노동-돌봄 노동-과 자본 축적을 위한 임금 노동의 분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분리의 경제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 경제, 즉 이코노미 economy는 살림살이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다. 경제를 뜻하는 이코노미는 살림살이를 뜻하는 오이코스에서 유래했다. 경제생활은 곧 스스로의 의식주를 직접 충당하는 노동으로 이해되었고, 이러한 노동은 출퇴근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삶의 절대적 필요 여하에 의해 진행되는 노동이었으므로 자급적인 성격을 띠며, 모든 것은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간혹 예외적으로 물물교환이나 작은 규모의 무역은 존재했으나 주된 것은 역시나 지급 생산이었다. 생산과 소비가 모두 눈에 보이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 여성과 남성의 노동 영역은 크게 구별되지 않았으며, 여성의 노동이 불필요하고 무가치하며 비가시화되는 일도 없었다. 언제나 경제의 중심이 가정의 재생산 노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구 근대 자본주의와 세계화된 무역 경제 이후,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더 이상 경제와 살림살이는 동일한 의미가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서구에서 일어난 근대 자본주의에서는, 화폐 경제를 주류 경제로 만들고 임금 노동을 주류 노동 모델로 고착화시켰다. 임금 노동의 자격을 부여받는 것은 건장한 성인 남성이 그 조건이었으며, 여성은 남성과 자본, 자본가들과 기계가 만들어 낸 주류 경제의 영역에서 배척당했다.
그와 동시에 여성의 노동은 주류 경제인 화폐 경제에 편입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해 그림자처럼 여겨졌다. 여성이 가정에서 해 온 노동은 인간이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돌봄이었다. 임금 노동자의 재생산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노동이지만 아무도 그것의 존재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당연히 따라붙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짐과 동시에 자본 축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폄하되었다.
가정과 경제의 분리는 여성을 보이지 않는 공간-가정-으로 밀어 넣었고, 동시에 보이지 않는 구성원으로 취급당했다. 주류가 된 화폐 경제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 생산지와 소비지의 분리, 노동과 삶을 분리시켰다. 여성적 노동-돌봄 노동과 재생산 노동-은 더 이상 생산적 활동으로써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으며, 가정 역시도 생산의 영역이 아니라 단순한 소비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경향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더욱 극대화되면서 갈수록 뚜렷해졌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고 나서는 화폐 경제의 권력이 커지면서 오로지 임금 노동밖에 보이지 않는 현상이 발생했다. 어느덧 인간의 삶은 임금 노동과 소비로만 구성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인생의 시간을 임금 노동에 바치고, 그 외의 시간은 임금 노동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자 소비의 시간으로 주객이 전도되었다. 이제 가정 경제의 중심이자 인류의 원천이었던 재생산 및 돌봄 노동, 쉽게 말해 가사는 기피해야 할 일이 되었다. 최대한 시간을 아껴야 하는 일이나 이윤 창출의 수단이 아니라는 이유로 하찮게 여겨졌다.
나의 삶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노동을 하느라 하루의 기력을 모두 소진하고, 정작 스스로의 삶을 돌볼 시간과 기력은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활동, 충전하는 활동, 즉 다시 말해 인간의 본래 삶이었던 먹고 자고 입는 활동은 모두 상품의 영역에 흡수되었다. 인간은 스스로의 살림살이를 시장에 외주 맡기며 살아가게 되었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귀찮고, 무가치하며 상품으로 해결하면 그만인 일이 되고야 만 것이다.
현대인은 이제 병원의 고객님으로 태어나 일생을 상품의 고객님으로 살아간다. 밀키트, 세탁기,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를 구입하는 행위로 나의 살림은 시장에 떠맡기고, 정작 나와는 관계없는 노동을 위해 인생을 바치다가 병원에서 고객으로 생을 마감한다. 현대인은 평생 시장의 고객이자 시장의 생산자로 살아간다. 여기에 주체적인 삶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대인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라고는 ‘어떤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어느 자본가의 자본 번식 도구가 될 것인가’를 궁리할 자유밖에 없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인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삶과 노동의 분리, 가시경제와 비가시경제의 분리는 노동 사이에 위계질서를 세워냈다.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하등 인간 취급당한다. 그러나 가시경제 속에서 노동을 하는 인간은 자각하지 못할 뿐, 자본가를 위해 삶을 바치는 노예의 삶을 산다.
자본가가 원하는 노동을 수행하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돌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돌봄 노동을 무시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왜곡이 생기고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임금 노동의 삶은 필히 가정 노동, 자급 노동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급 노동의 가치는 집에서 살림이나 한다는 말로 폄하된다.
그러나 인생의 주체성을 자본에 위탁하고, 돈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삶은 자유로우며 주체적인 삶인가? 어느 상품의 생산자가 될 것이며 어느 상품의 고객님이 될 것인지 만을 선택하다 가는 삶은 과연 다채로운가? 우리는 자유를, 평등을, 주체성을 시장 경제로 인해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음에도 ‘소비자’라는 거짓된 권력에 취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은가?
살림살이가 외주화된다는 것은 상품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이 없으면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는 세상이 과연 옳은 것인지 다시 한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나를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고, 가족을 살리기 위한 삶의 기술은 까마득하게 잊은 채 슈퍼마켓에서 상품 구입으로 해결한다. 근대화 이전까지만 해도 인류는 자기 자신의 삶을 직접 지어왔으나 이제는 삶을 살-live-지 않고 삶을 산-buy-다.
이제는 가정에서 자급 노동을 담당하던 여성들이 주류 경제에 편입되기 위해 경제활동에 뛰어들고 있다. 세상의 논리를 답습하여 더 좋은 상품의 소비자가 되는 것이 성공의 길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만연하게 퍼져있는 이 믿음은 사실 그 근본부터가 잘못된 믿음이다. 우리는 다시 노동을, 가정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애초에 살림이란 글자 그대로 무언가를 살게 하는 행위를 이야기한다. 살림은 나와 가족을 먹고 살도록, 생을 이어가도록 해주는 거룩한 행위이다. 노동을 위한 노동, 자본을 위한 자본의 논리를 답습하는 것은 주체적인 삶의 행위자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한 타율적 노동은 사람을 살게 하는 자유로운 노동이자 궁극적인 원천이 되지 못한다. 더 좋은 보수는 더 유능한 노예라는 의미에 그칠 뿐이다. 삶과 노동의 분리를 끝내고 다시 살림살이의 기술을 되찾을 때 우리를 옭아매는 권력구조에 비로소 변화가 올 것이다.
[조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