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은빛 억새와 치명적 단풍의 앙상블, 포천 명성산

여계봉 선임기자

원로 가수 고복수 선생이 부른 ‘짝사랑’이라는 노래 첫마디는 "아~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한다. 가을이 오면 60대 이상 장년층들은 으레 이 가사를 읊조리며 계절의 상념에 빠지곤 한다. 그런데 ‘으악새’는 날아다니는 ‘새(鳥)’가 아닌 ‘억새’의 경기도 방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가을은 채웠던 것들을 비워내는 계절이다. 잎 떨군 나무들의 누드, 그 허심(虛心)한 풍경이 있는 가을날, 포천 명성산에는 산정호수를 내려다보며 은빛 억새가 춤춘다. 흔한 억새라지만 명성산 팔각정 아래 약 6만여 평의 산 사면을 뒤덮은 억새의 군무는 가히 황홀경이다. 아침부터 날씨가 잔뜩 흐려도 눈에 아른거리는 억새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경기도 포천으로 길을 나선다.

 

억새가 운무와 만나 은빛 바다를 이룬 포천 명성산

 

명성산 억새꽃 축제가 한창인 산정호수 행사장을 빠져나와 명성산 억새밭을 향해 길을 잡는다. 호젓한 가을 산길에는 자신의 헛된 나뭇잎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간다. 비선폭포 삼거리에서 책바위 코스(제2코스)로 길을 잡는다. 책바위 코스는 하산 예정 코스인 완만한 1코스와 달리 가파르지만 산정호수의 조망이 시원하고 비탈지고 거친 바위를 체험할 수 있어 암릉 산행의 묘미를 즐길 수 있다. 화강암 덩어리인 책바위 아래에는 굴이 하나 있는데,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접근하기도 쉽지 않은데 바위 아래에는 왕건에게 패한 궁예가 피신했던 궁예굴이 있다.

 

명성산 책바위. 바위 아래에는 궁예가 피신했던 궁예굴이 있다.

 

명성산(923m) 산 이름에는 슬픈 사연이 담겨있다. 부하 왕건(王建)에게 쫓기어 피신하던 태봉국의 왕 궁예(弓裔)가 이 산에서 목숨을 잃게 되는데, 주인을 잃은 신하와 말이 산이 울릴 정도로 슬프게 울었다고 하여 울음(鳴聲)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명성산 자락에는 궁예가 숨어 있었다는 개적동굴을 비롯하여 궁예봉과 궁예능선, 왕건의 군사를 정찰하기 위한 망무봉(望武峰), 궁예의 군사들이 왕건 군대에 패했다는 패주골 등 비사가 깃든 곳이 많다. 1,200년 전 명성산 동굴에 숨어든 패주(敗主) 궁예는 바람에 출렁이는 억새들을 보면서 바르지 않은 정치로 백성의 버림을 받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을 것이다.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인 이 산에 부딪히는 바람, 억새를 흔들어 만든 풀들의 아우성과 궁예의 울음소리가 울음산을 만든 것이다. 

 

 경사가 급한 2코스 철계단에서 내려다본 산정호수

 

책바위를 지나면 경사가 급한 철계단이 몇 번 반복되는데 여기에서 왼쪽 아래로 조망되는 산정호수의 풍광이 가히 절경이다. 힘든 계단길이 끝나면 명성산 주 능선에 올라서는데 거친 산길을 따라 계속 나아가면 팔각정이 나온다. 팔각정 아래가 바로 억새 군락지다. 팔각정 옆에는 명성산 표지석이 하나 서 있는데, 억새 군락지를 찾은 사람들을 위한 포토존이다. 명성산의 진짜 정상 표지석을 보려면 팔각정에서 능선을 따라 1시간 30분가량을 북쪽으로 더 가야 한다. 팔각정 주위는 2026년에 완공되는 대형 케이블카 토목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데, 이 공사 때문에 명성산 계곡물이 흙탕물로 변해 보기에 민망스러울 지경이다. 

 

팔각정 아래 약 6만여 평의 산 사면을 뒤덮은 억새의 군무

 

포천 명성산은 정선 민둥산, 영남 알프스, 창녕 화왕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5대 억새 군락지 중의 하나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명성산에 억새밭이 생긴 까닭은 과거 화전민들이 산에 불을 놓아 잡목을 태우고 밭을 일궜기 때문이다. 이후 화전 경작이 금지되면서 명성산 능선은 생존력 강한 억새가 대신 터를 잡았다. 팔각정에서 억새밭 사이로 난 나무데크를 따라 내려가면 성인 남자보다 키가 큰 핑크빛 억새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 사이를 걷는다는 것보다 헤쳐 간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이다. 

 

은빛 억새가 서럽게 춤추는 억새 바람길 

 

억새의 꽃말은 ′은퇴′인데 쓸쓸한 가을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푸른빛이 감도는 하늘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은빛 억새의 물결은 가을을 더욱 깊어가게 한다. 출렁이는 은빛 물결 속을 거닐면 가을의 정취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화려한 단풍에서 느끼지 못한 수수한 가을의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억새밭 전망대에 서면 동북쪽으로 상해봉, 대성산, 백암산, 동쪽으로 광덕산, 동남쪽으로 백운산,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조망할 수 있다. 

 

은빛 억새에 이어지는 치명적 단풍길

 

억새밭을 내려와 등룡폭포로 가는 하산 길에 만나는 단풍은 가히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치명적 단풍 빛에 취해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계곡을 내려오면 물줄기가 제법 우렁찬 등룡폭포를 나온다. 차가운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만나니 소리들은 소쇄(掃灑)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단풍이 아름다운 등룡폭포

 

산정호수로 하산하여 들린 자인사(慈仁寺)는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을 등 뒤에 놓고 산정호수를 자애롭게 바라보고 있다. 1,500년 전 궁예와 왕건, 그들이 겪은 갈등과 원한을 부처님의 ′자비′로 포용하고 화합하기 위해 절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절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래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절집이 산에 있음은 얼마나 적실(適實)한가.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번거롭고, 마음이 밝으면 세상이 밝다. 눌러진 생각들, 잠겨진 꿈들이 슬금슬금 풀린다. 뜰에 부는 한 올 바람에 머리가 가벼워진다. 작은 것 하나에도 쉽게 화를 내고, 사소한 것이라도 나와 다른 것이라면 경계하는 우리에게 작은 절집은 커다란 메시지를 던져준다. 

 

자비와 화합을 염원하는 고찰, 자인사

 

절집을 나와 호반으로 내려선다. 산정호수 둘레길은 만추의 서정을 듬뿍 맛볼 수 있는 운치 있는 호반길이다. 둘레길은 호수를 한 바퀴 감싸고 있는 산정호수 수변은 붉은빛 적송들이 호수로 드리워진 약 3.2km에 이르는 데크길로 되어 있다. 걷는 내내 병풍처럼 둘러싼 명성산을 중심으로 양옆의 망봉산과 망무봉, 그리고 이들의 반영(反影)을 담은 잔잔한 호수가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아 호반의 정취를 제대로 느끼며 편안하게 산책할 수 있다. 

 

명성산의 반영을 담고 있는 산정호수

 

호수 주변의 수목은 노랗고 발간 오색 자태를 훌훌 털어 내느라 분주하다. 가을의 정취를 맛보기로는 이맘때가 제격이다. 가을 호반에 서면 그야말로 오감으로 계절의 변이를 실감할 수가 있다. 시각은 물론 청각 촉각 등 온몸이 흡족한 호반길을 담보해준다. 간간이 풍기는 마른 낙엽 냄새는 또 어떠한가? 굳은 마음에 가을 감성의 훈풍을 불어넣는 계절의 진한 여운이 호반에 녹아있다. 

 

전 세계가 전쟁으로 깊은 시름에 빠져 가슴이 먹먹한 요즘, 계절이 주는 마음의 위안이라도 받고 싶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추의 서정을 노래하는 명성산으로 떠나 보는 건 어떨까?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yeogb@naver.com

 

작성 2023.10.28 09:38 수정 2023.10.2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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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