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희 칼럼] 나의 영원한 흑기사

김다희

죽음만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깨어있는 모든 순간이 고통스러워 잠에 드는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다음날 아침이 오지 않기를 빌었다.


그런 밤들은 고통스러웠지만 나를 변화시켰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당장 죽을 위험이 없는 사람의 허세일 가능성이 높지만 확실히 전처럼 죽음이 무섭지는 않았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처지에서만 쉬워지는 것들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늘 관을 집에 두고 보며 죽음에 대해 얘기했다고 한다. 죽음에 대해 쉬쉬하지 않았다. 삶에 대한 감사함을 배가시키는 용도로 죽음을 써먹었다. 나도 죽음을 이용하기로 했다.


명상으로 초월적인 의식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수많은 종교와 영적 전통, 그리고 과학적 연구들이 입증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시작했다. 자아를 포함한 모든 것과 최대한 실감 나게 작별인사를 했다. 어떤 날은 정말로 두려워졌고 거의 모든 날에 행복해졌다.


당장 죽어도 좋다는 마음은 필연적으로 생명의 본질을 관조하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진리 속에서 모든 생명과 연결돼 있음을 느낀다. 존재하는 모든 것과 유한함이라는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는 별을 보고, 시들어 가는 꽃망울을 보고, 가을의 끝자락을 보고 우리 속에 순환하는 우주를 직감한다.


죽음을 떠올린 순간 삶이 빛나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차 넘실거리고 더 이상 나 자신에 집착하지 않았다. 현실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들을 넘어서 삶 자체에 감사하게 되었다. 희붐하고 바삭한 아침이 오면 곧 늙고 파리한 밤이 오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조셉 캠벨의 영웅 서사, 영웅의 여정에서 '고래 뱃속'은 주인공이 상징적으로 죽고 다시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단계를 말한다. 고래 뱃속은 낡은 자아가 죽는 무덤인 동시에 다시 태어나 부활하는 자궁이다. 죽음은 삶만큼 일상에 밀접해있다. 우리는 늘 무언가와 작별하고 있다. 사람, 밤, 계절을 보내고 또 다른 아침을 맞이한다. 죽음을 버리고 삶만 취할 수는 없다.


삶이 괴로울 때면 죽음을 생각했다. 명상을 하며 나를 잊는 순간이 좋았다. 무아지경으로 표현되는 그 순간들은 기껏해야 5초 정도로 아주 짧았지만 그 찰나에 나는 무한한 자유로움과 평화를 경험했다. 살면서 그 어떤 행복도 내게 주지 못한 무궁한 자유였다. 그 몇 초 동안 나는 태고의 바다처럼 순수했고 반짝이는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없는 상태는 자유 그 자체이다. 행복하다. 나도 세상도 사라지고 공기청정기의 소음 속으로 녹아든다. 그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중립의 소음 속에 진리가 있다. 만물이 들어있다. 나를 죽인다. 죄가 사해진다.


런던에 살 때 이스트본이라는 남부 도시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휴양도시인 그곳에 간 이유는 오로지 하나, 세븐시스터즈를 보기 위해서이다. 세븐시스터즈는 하얀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절벽에 서있는 7개의 언덕이다. 


하이킹 시작부터 나는 지구 어디서도 보지 못한 경치에 푹 빠져버렸다. 사방이 끝을 가늠할 수 없게 펼쳐져 있었다. 왼쪽으로는 새파란 바다, 오른쪽으로는 양 떼와 말들이 풀을 뜯는 초록빛 초원, 앞뒤로는 하얀 절벽. 즐거운 흥분에 세븐시스터즈의 중간지점까지 무리 없이 도착했다. 언덕이 꽤 가팔랐지만 풍경에 취해 피곤을 느낄 새가 없었다.


3시간이 지나고 세븐시스터즈의 막내에 도착했다. 그러나 막내를 보고 택시를 잡아 돌아가려던 우리의 계획은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끝 지점은 황량한 벌판이었고 첫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세븐시스터즈의 거리는 무려 13킬로미터로 6시간이 걸리는 코스였던 것이다. 물도 떨어지고 쫄쫄 굶은 상태로 눈앞에 처음처럼 다시 쭉 늘어선 일곱 자매를 보며 우리는 마른 침만 꼴깍 삼키었다. 그리고 다시 발을 내디뎠다. 


눈앞에 수직으로 거대하게 솟은 언덕을 보면 도저히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걸음 한걸음 나 죽었다 하고 오르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었다. 그렇게 정상에서 하얀 절벽과 푸른 바다, 초록빛 초원을 내려다보면 다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자신만만해졌다. 그리고 풍경을 즐기며 내리막을 걷다 보면 다시 거대한 언덕이 눈앞에 와 있었다. 또다시 시작이었다. 끝이 없었다. 이 과정을 일곱 번을 반복하다 보니 언덕을 오르고 내리는 것이 인생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보면 도무지 오를 수 없을 것처럼 잔인하게 가파르고 무시무시하게 높은 언덕도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어느새 내 발밑에서 끝이 난다. 금세 꼭대기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된다. 내리막은 즐겁고 경쾌하다. 언제 힘들었냐는 듯 살맛이 난다. 나는 야생화가 즐비한 내리막에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누워서 데굴데굴 굴러내려 왔다. 어지러웠지만 끝내주게 재밌었다. 


불행을 나타나는 단어 Disaster의 어원은 '불길한 별'이다. 점성술의 영향이 컸던 과거에는 불운이나 불행이 천체의 움직임에서 도래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다 벌거벗은 채로 여관에서 쫓겨난 밤 모네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악한 별 아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해." 그때는 별이라도 탓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나 전염병 같은 큰 불행도 견뎌냈던 걸까.


살다 보면 사악한 별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역경, 장애물들이 찾아온다. 그때마다 우리는 겁을 먹고 의기소침해지지만 결국엔 살아남는다. 눈앞에 말도 안 되는 높이로 솟아있는 그 언덕을 결국은 넘어선다. 어떻게 고비를 넘겼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직 걷고 있다는 것이다.


사악한 별이 찾아와 괴로울 때마다 삶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흑기사를 미리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가 인생이 던져놓은 이 모든 암초들을 박살 내고 바다를 가른 뒤 나를 데리고 가리라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내가 먼저 부르지 않고 그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용기가 생기기도 했다. 힘들면 힘들수록 반드시 나를 잡으러 올 흑기사의 존재가 고마워졌다.


프로이트는 모든 생명의 목표가 죽음이라고 했다. 언제든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은 불행조차 팔 벌려 맞이한다. 어떤 고난도 언젠가는 끝이 나고 나의 흑기사가 말을 재촉하며 밤길을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김다희]

이메일 universeofdahee@gmail.com

 

작성 2023.11.03 11:11 수정 2023.11.03 11:30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광주루프탑카페 숲안에 문화복합공간 #로컬비즈니스탐험대 #우산동카페 #광주..
2025년 4월 25일
2025년 4월 25일
전염이 잘 되는 눈병! 유행성 각결막염!! #shorts #쇼츠
2025년 4월 24일
2025년 4월 23일
2025년 4월 22일
나는 지금 '행복하다'
2025년 4월 21일
2025년 4월 20일
2025년 4월 19일
2025년 4월 18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6일
2025년 4월 15일
2025년 4월 14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