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석 칼럼] 시골집에 살면서

허석

울퉁불퉁하고 삐뚤빼뚤하다. 벽과 천장, 바닥 어디에도 자로 잰 듯 반듯한 곳이 없다. 벽마다 전깃줄이 얼기설기하고 천정마다 반자 평형이 들쑥날쑥하다. 어두침침한 흙창과 손바닥만 한 뙤창이 채광과 통풍에 고작이다. 

 

버름한 문틀, 마른 국화 무늬가 배인 창호지에 첩첩 겹겹 그리움이 달빛처럼 스며들었다. 높은 곳이 없다. 내 키가 이렇게 컸던가 싶게 머리가 천정에 닿을 듯하다. 방문도 어깻죽지에 못 미쳐 들랑거릴 때마다 고개도 숙이고 허리도 굽혀야 한다. 겸손하지 못했던지 벌써 문머리에 이마를 몇 번이나 찧고 말았다. 오래된 옛날 집이다.

 

시골에 잠시 거주할 일이 생겼다. 평생 살고 있는 아파트보다야 이참에 맨땅을 밟으며 사는 것도 좋겠다 싶어 앞마당과 텃밭이 있는 허름한 옛집으로 이사를 했다. 오래전 누군가가 맨손으로 지은 흙집이다. 겉보기에도 들 찬 데 없고 엉성해 보여 문명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경한 마음이 이를 데 없다. 성하의 메숲진 계절이었다.

 

마당에 내려선다. 나무들도 하나같이 옛사람의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감나무나 대추는 식구들 주전부리로, 가죽나무나 엄나무 순은 봄철 입맛 돋우느라, 산초와 제피나무는 음식에 양념용으로 심었을 테다. 꽃사과나무는 웬일일까. 누구에겐가 그리운 마음을 새콤한 향내에 담아두려 했을까. 방울토마토 같은 열매가 꽃숭어리로 매달려 파란 하늘을 온통 빨갛게 물들이고 있다. 

 

매미들은 터앝 고추 줄기에 허물을 벗어놓고 짝을 찾느라 목청을 뽑아 아우성친다. 은사시나무 잎사귀가 실바람과 연애하느라 재갈재갈 배를 뒤집으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 구분도 못 하는 딱새, 멧새, 오목눈이들이 경계선도 아랑곳없이 수시로 담장을 넘나든다. 지렁이가 밀어내놓은 흙 탑들이 마당에 즐비하다. 호기심에 호미로 후비적거리면 온갖 땅속 임자들이 혼비백산이다. 탱자나무 담장 곁으로 색색의 봉숭아가 알록달록 무리를 지었다. 

 

손톱 위에 올려놓은 꽃물이 흐트러질까 봐 대한독립 만세 자세로 밤을 새운 누이가 눈 비비며 걸어 나올 것 같다. 풀어쓰기 해놓은 한글처럼 개미 떼가 양지바른 길목을 꼬물거리며 지나간다. 마가목 그늘아래 고양이 일가족이 무료한 오후의 늘어진 하품을 한다.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살았던 어린 시절 그대로의 정겨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도시에서만 자란 딸의 첫 반응이 “이런 데서 어떻게 살려고요?”였다. 경험한 적 없으니 당연하다 싶다. 날로 편하고 지능화되는 건물구조와 생활양식에 익숙한 현대인에겐 이해 못 할 일인 것도 같다. 그래도 손녀는 놀이방처럼 재미있는지 마당으로, 섬돌로, 툇마루로 무한 되돌이표 하며 폴짝거린다. 남들 눈에는 누추하지만 정작 당사자의 평안한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자연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 태생이어서일까, 적빈한 살림에 익숙해진 습관일까, 아니면 어처구니없게도 혼자만의 독립된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문이 작고 천정이 낮아 덩치 큰 가구를 들여놓을 수가 없다. 방은 작지만, 텅 비어있으니 오히려 여유로 충만하다. 최소주의(minimalism)의 삶이 이런 것일까.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성의와 재미가 있고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일거수일투족이 자주적이라 불평불만이 없다. 

 

‘해야 해!’하는 압박감보다 ‘해볼까?’ 하는 능동형의 일과다. 규칙과 시간표를 아예 정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지금 하지 않는 것도 더불어 즐거운 일이다. 내 먹을 것 내가 생산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걸어가는지 끌려가는지 건공중에 놓였던 도시 생활에서 이제야 발을 바닥에 내려놓은 것 같은 안정감과 편안함이 다가온다.

 

예전 우리들의 집은 자연의 일부였다. 가족이 함께하는 공간이고 보금자리였을 뿐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도, 재테크나 환금성의 수단도 아니었다. 낙서하지 마라, 물 튀기지 마라, 상전처럼 집을 모시고 사느라 노심초사하지도 않았다. 불편해도 전혀 아쉽지 않고 초라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안식처였다. 놀이 공간인 자연은 어디에나 있고 언제 어디서나 내 편인 식구들도 품 안에 여전했다. 빛은 있어도 눈부시지 않고 닫혀 있는 것보다 열려 있는 것이 많은 곳이었다.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를 본 적이 있다. 몸통의 둥근 곡선과 풍만한 기형이 보기에도 두루뭉술하고 육덕지다. 밑받침이 좁고 비스듬히 경사져 있어 대칭이나 비례가 맞지 않는다. 뒤뚱한 것이 왠지 불균형이고 불완전해 보인다. 그렇지만 편하다. 꾸미거나 뽐내는 짓이 없다. 넉넉하고 여유로운 것이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 같다. 한낮의 변화를 보듯 돌려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양과 느낌은 각양각색이다. 정물은 사라지고 민속(民俗)을 읽는 듯 질박한 정겨움이 앞선다.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 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아주 많이 일그러지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닌 이 어수룩하면서 순진한 아름다움에 정이 간다.’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의 표현이다. 완벽하고 인위적인 조형미보다는 자연스러움과 인간적인 분위기의 아름다움을 말함이리라. 무늬나 치장도 없이 단순한 멋, 있는 그대로의 삶에 순응하고 수용하는 관용의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닐까. 

 

나는 지금 달항아리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평수도, 학군도, 내 집과 남의 집에 대해 의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집이다. 신분과 계급도, 차별과 분별도, 많고 적음도 경계밖에 있다. 속도와 합리보다 여유와 향유가 먼저다. 느린 것 같지만 휴식이 있고 허술한 것 같지만 풍요가 있다. 찾아오는 자 반기지만 불편해하는 자 굳이 초대하지 않아도 되는 집이다. 생활 수준을 따지기에 앞서 시골집이 주는 단순하고 너그러운 삶에 자적하는 요즈음이다.

 

행복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로 바꾸면 될 것 같다. 겉보기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강하게 하는 일이다.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말과 행동을 줄임으로써 근심거리나 가슴앓이도 사라지고 안달하거나 쫓기는 마음 없이 나를 위한 시간에 충실해졌다. 살면서 그렇게 집착했던 중요하고 대단해 보이던 일들이 지나고 보면 얼마나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었는지도 이제는 알겠다. 움직이는 것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 나이 덕택이다.

 

날씨가 쾌청하다. 뜰 안 그늘에 앉아 오래된 책을 펼쳐 든다. 새물내 풍기는 바지랑대 옷가지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뽀송뽀송 말라간다. 멀리서 잠언 하나 들려온다.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라.’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3.11.07 09:43 수정 2023.11.0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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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