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이 점점 익어가는 날에 일몰이 서러워 보인다. 고샅길 따라 산책을 나서니 가을이라기보다는 초겨울이 어울리는 제법 쌀쌀한 11월 중순이다. 11월을 더듬어 본다.
11월은 시간을 몰고 간다. 세월의 흐름에 민감할 필요가 없어 ‘참으로 빠르다’라는 말은 부질없는 메아리다. 하지만 겨울이 가까워져 올 때면 더욱 속도를 더 한다.
F=ma라는 간단한 수식이 떠오른다. 힘(F)은 질량(m)과 가속도(a)에 비례한다. 1년 중에 11개월을 보내면서 얼마나 가속도가 붙었는지 연말이 가까워져 오면 시간이 아주 빠르게 흘러감이 느껴진다. 세월이 힘이라면 추위는 질량이고 이미 보내버린 11개월이 가속도를 붙이는 것 같다. 힘을 이기기 위해서는 반력反力이 필요하고 그 반력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11월은 가족 간의 정을 다듬는 달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보기 좋은 일들이 간혹 있다. 어젯밤 저녁 공기가 제법 쌀쌀한데 버스 정류장에서 어느 할아버지가 윗옷을 벗어 손자를 꼬옥 감싸니 옆에 있던 딸이 말한다.
“아버지도 추운데 옷 입으세요.”
“아니다. 나는 괜찮다.”
자신은 조금 추워도 외손자만 따뜻하면 자신도 포근해지고 자식들만 배부르면 정작 자신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은 전형적인 내리사랑이다. 늦가을이 춥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기온을 나타낼 때 한도寒度라 쓰지 않고 온도溫度라 하는 것은 춥다는 개념이 아니라 따뜻한 정도를 말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추워도 인간미 넘치는 따뜻함만 있다면 다가올 겨울이 춥지 않을 또 하나의 이유다.
11월은 안타까운 달이다. 앞의 달은 ‘시월의 마지막 밤을...’이라는 대중가요 노랫말로 해서 유명하지만 11월은 아무도 노래해 주지 않으니 빈곤함과 안타까움이 겹친다.
11월은 스쳐 지나가 버리는 달이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의 짧은 기간에 걸린 어정잡이다.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는 불분명한 달이다. 자신의 뒤에 12월이 있음을 알려주는 전달자에 불과하다. 낙엽이 떨어지는 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겨울을 향해 달려간다.
겨울 준비도 되지 않은 어설픈 옷차림으로 차가운 아침이슬을 맞으며 쓸쓸한 아침을 연다. 11월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조용히 머물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무영無影의 달이다. 10월의 화려함과 마지막 12월의 상징적인 의미에 쫓겨 여유도 없이 내몰리며 눈칫밥을 먹는 달이다.
11월은 한 해를 저물게 하는 달이다. 석양이 질 때 서쪽 하늘은 한풀 꺾인 열기의 붉은 태양을 머금는다. 이달은 마치 해가 지는 저녁의 서글픔을 안고 저물어 가는 서녘 하늘의 태양과도 같다. 지는 해는 그 빛을 다하지 못하고 맥없이 꼬리를 감추듯 힘이 없다.
11월은 한쪽으로 밀려난 찬밥 신세다. 잠시 머물다 저물어 버리는 달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위로와 격려를 해주지 않는 달이 분명하다. 그래서 한 해를 저물게 하는 달은 12월이 아니라 11월이다.
올해도 11월은 서둘러 짐을 싼다. 하지만 자신의 역할은 끝나고 다음 달이 자리 잡을 준비를 하고 있다. 올해도 11번째 달이 열심히 달려가고 이어서 12번째 달이 기다리고 있다. 화려한 끝을 장식하기 위해 바쁘게 달려오는 12월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11월!
달려온 길을 뒤 돌아보니 길은 투명하게 지워져 다시 갈 수 없다. 올해에도 꼿꼿함만을 간직한 채 땅바닥에 떨어진 꽃잎 같다. 11월의 경우의 수는 떨어짐이다.
[김태식]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선박기관시스템 공학과 졸업(공학석사)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울산신문 신춘문예(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wavekt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