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난 더 행복해지겠지. 4시가 되면 벌써 난 설레고 안절부절 못할 거야. 그러면서 행복의 가치를 알게 되는 거지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 왕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 마지막 장면이 긴 여운을 남긴다. 주인공 와타나베가 공중전화부스에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미도리가 묻는다.
“ 자기,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와타나베는 순간 당황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곳이 어디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는 생각한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누가 우리에게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물으면 우리는 답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삼차원 세계에 있는 자신을. 하지만 이게 맞을까? 시간과 공간의 축으로 정해지는 자신의 위치, 이것은 하나의 ‘사회적 합의’에 불과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저 멀리 있는 별에서 몇 시에 만나자는 약속이 가능할까? 저 먼 창공으로 우주선을 타고 날아간 사람이 서울에서 1년 뒤에 만나자는 약속이 가능할까?
그가 1년 뒤에 돌아오고 나면 서울에서는 훨씬 많은 시간이 흘러갔을 것이다. 시간은 장소에 따라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미도리의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잠시 후 그는 깨닫는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 가운데, 바로 ‘지금 여기’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잡아라’의 현재다. 자신이 있는 이곳의 현재다. 와타나베는 미도리가 준 ‘나는 어디에 있는가?’의 화두를 단박에 풀었다. ‘카르페 디엠’
이제 와타나베는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사막의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가르쳐 준 사랑이다.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난 더 행복해지겠지.”
이런 사랑의 순간에, 우리는 카르페 디엠을 알게 된다. ‘오롯이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비로소 행복의 가치를 알게 된다. 한 선사는 말했다. “우리는 어디에 있건 땅 위에 있다.” 땅 위의 어디라고 자신이 있는 곳을 나누는 순간, 우리는 지금 여기에 머물지 못한다.
항상 어딘가를 쳐다보게 된다. 막연히 무언가를 기다리게 된다. ‘고도를 기다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극작가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사랑을 잃어버린 현대인, 그래서 항상 안절부절못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을 풍자하고 있다.
그는 지금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더는 밀려 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이제 박차고 일어설 일만 남은 것 같다
한밤중에 깨어나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면
들끓는 세상이 잠시 식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갈증은 그런 게 아니다
- 강연호, <바닥> 부분
오래전에 들은 우스개,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 흔히 하는 말, ‘바닥에 떨어지면 이제 오를 일만 남았어.’ 고대 중국의 철인 노자의 지혜다.
바닥에 떨어진 공은 위로 튀어 오른다. 우리도 공처럼 무심하면, 그런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