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조선으로 이어진 우리의 선비정신을 무슨 색깔로 묵시하면 좋을까. 이 선비정신은 유학과 경학을 아우른 실학이요, 실사구시와 무실역행을 응결시킨 정신응어리이며, 이 철학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었다.
이는 단순히 학문적 교양을 갖춘 사대부정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키우며, 대의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행동을 수반하는 태도와 태세를 말한다. 그 색깔을 백(白)으로 치면 어떨까. 물들이지 않은 베의 원단. 선비가 물이 들면, 그는 이미 선비가 아니라 치비(治卑)가 아닐까.
오늘날 대한민국 관료철학의 공통색깔은 있는가. 없는가. 무리지어 오고 가는 철새보다도 못한 관배(官輩)들이,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영혼도 없는 저마다의 색깔을 들고 펄럭거리기 때문에, 그 색깔의 근저가 궁금한 것이다. 그들은 아예 공통된 관료철학이 없는 듯하다.
모양도, 형체도, 향기도, 매력도, 끌림도 없는 저들의 행세(行勢)에 눈총을 겨누면서, 1965년 이미자의 목청을 넘어온 조광조의 이야기, 영화 <정동대감>의 OST를 펼친다.
영을 넘고 강을 건너 남도 천리를 / 헤어져 그린 그님 찾아 가는데 / 철없이 따라오는 어린 손이 차갑구나 / 자장자장 잘 자거라 아가야 잠 들어라 / 이슬 내려 젖은 길이 멀기만 하다 // 사랑 찾아 님을 찾아 운명의 길을 / 천리라도 만 리라도 찾아 가련다 / 등에 업힌 어린자식 칭얼칭얼 우는데 / 자장자장 잘 자거라 아가야 잠들어라 / 이슬 내려 젖은 길이 멀기도 하다.
이규웅이 감독하고 김진규·김지미·이예춘·김기범 등이 열연한 영화. 노래의 주인공은 한양 조씨 조광조(1482~1519)와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다. 그가 살던 집이 서울 정동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별호가 정동대감이다. 그는 1519년 기묘사화로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능성현)으로 유배되었다가, 한 달여 만에 중중 임금이 내린 사약을 받고, 38세의 생을 마감한다. 그 시기 조선인의 평균 수명은 45~50세 정도 였단다.
그가 유배되었을 당시 아내 한산 이씨가 한양 정동에서 3세 전후의 두 아들(조정·조용)을 업고 안고, 남편 유배지를 찾아가는 서글픈 사연을 그린 영화 노래가 <정동대감>이다. 대하역사드라마 작가 신봉승(1933~2016. 명주 출생)이 노랫말을 얽고, 김천 출생 나화랑(1921~1983. 본명 조광환)이 곡을 얽었다. 당시 아내 한산 이씨가 두 아들을 업고 안고 건넌 강은 한강·금강·영산강일 테이고, 넘어간 령은 남태령·차령 등등의 고개였을 것이다. 서울에서 화순까지의 거리는 오늘날 고속도로로 치면 320여㎞, 1516년 당시 굽이굽이 길로 치면 500㎞가 될 터이다. 얼마나 각박했을까.
조광조는 참봉·선무랑등 벼슬을 거치면서 공부를 계속하여, 1515년(중종 10년)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문과 과거급제는 3년에 33명, 무과는 28명을 선발했다. 3차에 걸친 논술 시험에서 1~2차는 합격제, 3차는 등수를 매기기 위하여 임금 앞에서 답안지를 논술로 작성하였다. 당시 과거시험은 현직 공무원도 계속 응시할 수 있었다. 이에 9회 응시하여 모두 장원을 한 선비가 이율곡(1536~1584)이다. 그래서 9도장원공(九道壯元公)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과거급제 후 조광조는 중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대사헌 벼슬까지 초고속 승진을 한다. 그러나 반대파 홍경주·남곤 등의 모함으로 귀양을 간다.
조광조 유배지, 화순 능주에 가면 그의 유적지가 있다. 화순군청에서 10여㎞ 남쪽으로 가면 된다. 그곳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라는 비석이 있다. 적려(謫慮)는 귀양살이를 하던 오두막집이란 뜻, 유허비(遺墟碑)는 기릴 만 한 옛 자취라는 의미다.
그는 중종반정(1506)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을 도와 유교적인 개혁정치를 시행한다. 도교 사당인 소격서 철폐, 권선징악을 위한 향약실시, 토비와 노비 하사특권을 인정받았던 훈구공신의 훈적삭제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봉건시대의 급진개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급진정책은 기존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중종 임금도 조광조의 열정을 부담스러워하였다. 결국 그는 혁명을 꾀한다는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가고, 수많은 선비들이 처형당한다.
1519년(중종 14) 11월, 남곤, 심정, 홍경주, 김전 등이 조광조, 김식 등 신진 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혹은 귀양 보낸 사건이 기묘사화다. 그때 중종은 승지들도 모르게 갑자기 홍경주·김전·남곤·심정·정광필·안당 등을 경복궁 북쪽 신무문을 통해 들어오게 하여 비밀회의를 열었다. 그래서 기묘사화를 일명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도 부른다.
홍경주는 그 자신의 딸이 희빈으로 중종을 모시고 있는 것을 이용하고, 경빈 박씨 등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후궁들에게 조광조 타도를 종용하였다. 이른바 대궐 안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는 4자를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하고, 이것을 임금에게 보여 큰 충격을 주었다. 이때 走肖(주초)는 趙(조)의 파자에 해당하며, 은연중에 조광조가 왕위에 오른다는 참언이었다. 이때 죽은 신하들은 김정·기준·한충·김식·김구·박세희·박훈 등은 모두 30대였다.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이다.
오늘날 관료들의 영혼이 없는 철학과 불덩어리 표(票)를 들고 있는 국민들의 의식은, 어느 강으로 통하고 있는가, 흐르고 있는가. 있기는 한가. 오늘의 한국사회는 정치인도 판사도 검사도 특정 색깔에 물들어 있다. 권위도 없고 위엄도 없고 저울추 같은 중심도 없는 듯하다. 그러니 그들이 펄럭거리는 색깔에도 영혼과 철학과 가치가 응결되지 않았으리라.
임진왜란 당시 왜(倭)의 정명가도 수륙병진전략을 바다전투 23전승으로 파쇄한 이순신 장군은, 오직 조선이라는 나라와 조선 백성의 안위를 위하여, 적(敵)과 전투승리를 위한 상황에만 몰입했었다. 그는 장수전군명유소불수(將帥戰君命有所不受)를 실천한 장본인이다. 노량해전 관음포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하는 과정에서 절명을 하면서도, 전방급 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 유언을 남겼다. 오늘날 대한민국 관배(官輩)들은 <정동대감> 노래와 성웅 이순신 장군을 어찌 음유하고, 각성하고 있을까.
한비자(韓非子)에 중인(重人)이란 말이 있다. 명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며, 법령을 어기면서 자신을 이롭게 하는 사람을 말한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는 중인 취급을 받은 듯하다. 하지만 1544년 인종은 즉위한 후, 곧이어 기묘명현들의 신원을 복원하였다. 후에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 등은 동방사현(東邦四賢)이라고 불렀다.
조광조는 중종 임금이 내린 사약 사발을 눈앞에 두고 절절하게 읊조렸다.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 나라 걱정을 내 집 같이 하였도다 /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라.’정동대감의 절명시(絶命詩)다. 삼가 정동대감을 반추하면서, 오늘날 관배(官輩)들의 속내를 추추(錐錘)해본다.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유행가스토리텔러 제1호
글로벌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이메일 : 51944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