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래 들어 낱말을 제멋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어느 누구랄 것 없이 남들이 하면 덮어놓고 따라 하는 경향이 짙다. 특히 청소년을 비롯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게 뭐 그리 멋스럽게라도 보이는지, 영 마뜩잖은 마음이 앞선다.
‘개-’라는 접두어 사용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우리말 사전에는 ‘개-’를, 일부 명사 앞에 붙어서 ‘참 것이 아닌’ ‘야생의’ 또는 ‘정도가 심한’ 등의 부정적인 뜻을 지니는 말이라고 분명히 못박아 두었다. 개망초, 개떡, 개살구, 개꽃, 개망나니, 개꼴, 개죽음 등이 그 예들이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이 ‘개-’가 본래의 뜻과는 정반대인 ‘아주 좋은’ 또는 ‘멋진’의 의미로 왜곡되어 쓰이고 있으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세대들은 뭣도 모르고 입버릇처럼 ‘개꿀’ ‘개이득’ ‘개득템’ 해댄다.
어떻게 해서 이런 괴이한 현상이 생겨난 것일까.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해 보건대, 단순한 식용의 대상이던 개가 애완동물로 바뀌었다가 급기야는 반려동물로까지 격이 높아지면서 일어난 이미지의 변화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처럼 ‘개-’를 ‘아주 좋은’ 또는 ‘멋진’의 뜻으로 계속 왜곡되게 사용한다는 가정을 했을 때, 그렇다면 이 ‘개-’와 상대 개념어인 ‘참-’은 앞으로 설 자리를 잃고 도태되어 버리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구나 싶은 노파심이 든다.
명사로 쓰이는 ‘완전’이라는 낱말이, 부사로 오용되는 경우도 도무지 이해 못 할 일이다. ‘참 괜찮다’ ‘아주 오랜만이다’라고 해야 할 것을, “완전 괜찮다” “완전 오랜만이다” 해버린다. 일상생활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텔레비전 광고에서조차 “완전 맛있어”라며 엉터리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쓰고 있다. 심지어 어느 초등학교 담임교사는 제자들에게 ‘완전 잘한다상(賞)’이란 상장을 주기까지 했다고 하니, 할 말을 잃고 만다.
이뿐만이 아니다. 텔레비전 오락 프로에서 개그맨들이 그저 웃자고 한 소리가 유행어가 되어 국어를 오염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일테면, 우리말식 기수를 써서 ‘하나도 없다’로 표현해야 할 상황에서 일부러 한자식 기수를 써서 “1도 없다”라고 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 우스갯말이 이제는 사람들의 대화 가운데서 공공연히 입에 오르내린다.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다’ 해야 할 것을 “흠잡을 데가 1도 없다” 이런 식이다. 제법 먹물깨나 먹은 사람조차 걸핏하면 “1도 없다” “1도 없다” 해대니, 그들은 어찌 그리 줏대도 없나 싶다. 이럴 거면 우리말식 기수와 한자식 기수의 구분이 굳이 왜 필요할까.
너무 귀에 익어 거의 고전이 되어버린 ‘너무*’의 경우 역시 그렇다. ‘너무 잘됐다’ ‘너무 멋지다’ ‘너무 재미있다’ ‘너무 장하다’ 이런 표현들이 이제는 아예 잘못된 줄도 모르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형국이다.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학교에서 시험을 보거나 기업체에서 공개채용을 할 때 학생들과 응시생들이 어떻게 정답을 찾을 수 있으려나, 오지랖 넓은 걱정이 앞선다. 국립국어원으로서는 이 같은 상황들을 두고 어떻게 처신을 해야 좋을지 참 난감할 것도 같다.
위에서 든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국어오염, 그냥 팔짱 낀 채 지켜만 보고 있을 일인가.
*2015년에 국립국어원에서 ‘너무’를 긍정문에도 쓸 수 있게 사용 규정을 개정한 바 있지만, 이는 참으로 무책임한 처사라고 본다. 국립국어원의 규정에 따를 때, 그렇다면 ‘너무’에서 접미사 ‘~하다’가 붙어 파생된 ‘너무하다’도 과연 ‘참 좋다’ ‘아주 괜찮다’ 이런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인가.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