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빛이 길게 눕는 시간. 가을볕은 짧기도 하거니와 고단한 몸을 일찍 산등성에 기댄다. 종종걸음으로 가을은 길을 재촉하고, 겨울로 향하는 산천은 형상이 더욱 선연해진다.
겨울에 마음껏 해보고 싶은 일 몇 가지를 떠올린다. 뭐니 뭐니 해도 먹는 것이라면 누구에게나 환영받을 일. 몇 해 전 겨울에 횡성군 안흥면을 지나간 적이 있다. 창에 김이 서린 찐빵집에 들르지 못하고 그만 지나쳤다. 아쉬운 마음을 부여잡고 다음번엔 꼭 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창밖을 보며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팥소가 듬뿍 담긴 찐빵을 두 손으로 헤벌리며 정신없이 먹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질리지 않고 실컷 뜯어먹을 빵. 안흥찐빵이라면 두말없이 제격일 것이다.
다음으로 떠올리는 것은, 커다란 책상 위에 책을 잔뜩 쌓아놓고 이책 저책을 뒤적이는 장면이다. 세상사에 관련한 어떠한 연락도 받지 않고 책더미에 파묻혀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것. 춥거나 눈이 와서 바깥에 나가기 싫거나 나갈 수 없을 때, 책을 만지면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책을 읽는 장소는 개인 서재여도 좋고, 공공도서관이어도 괜찮을 것이다. 차 한 모금을 머금고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서재에서의 독서라면, 여러 신간 도서와 시리즈 간행물을 둘러보며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고 대출해 갈 수 있는 것이 도서관을 이용할 때의 좋은 점이다. 게다가 요즘은 휴게시설이 대체로 잘 돼 있으니 지인을 만나 반갑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져도 좋을 것이다.
겨울에 할 마지막 일로는 차분하게 수치를 계산해가며 실생활에 쓸 가구(목제가구)를 만드는 일을 꼽을 수 있다. 책장이며, 입식 옷걸이, 화분 받침대, 옷 수납대 등이 포함된다. 작은 목공품을 만들다 보니 이런 수고스러운 작업에 창조의 기쁨이 깃든다는 것을 알게 됐다. 멋진 외제 차나 화려한 옷을 구매하여 이용하는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겠지만, 번거롭더라도 땀 흘리는 투박한 일에 동반하는 창조적 즐거움과 내재하는 행복이 있다는 점 또한 내게는 새로운 발견이다. 몸이 바깥에 나가지 않고 한 곳에 있더라도, 할 수 있는 자신만의 일을 발견하는 것은 그런 까닭에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우연히도 시골 생활을 다룬 재미있는 책과 조우했다. 시골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돈보다는 기술”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책에는 화덕, 소형수력발전기, 석축 쌓기 등 전원생활에 필요한 여러 정보와 경험이 담겨있었다. 책의 내용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석축 쌓기였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그 많던 석공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근대 이후로는 콘크리트의 전성기가 틀림없으나, 시멘트가 대량 보급되기 이전 석축(축대)이나 돌담 등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석축 쌓는 일에 내재한 공동체 의식과 협동심이었다.
돌담은 아무렇게나 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 마을에서 석축을 쌓을 때면 먼저 좋은 날을 잡아야만 했다. 좋은 날이란, 날씨가 좋은 것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날을 의미한다. 석축은 한·두 사람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마을 사람 다수가 모여 힘을 보태고, 리더십을 갖춘 촌장이나 이장을 중심으로 경험과 기술을 갖춘 장인들의 지도와 조언이 필요했다. 즉 이 일에는 협동심과 구심력이 절대 필요했다. 구심력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돌무더기가 무너지지 않도록 당겨주는 중심축을 의미한다. 돌 하나하나가 바깥으로 흘러나가지 않고 안쪽 하부를 지향하도록 하는 중심선이 있어야 한다.
동네 사람 중에는 전문적 꾼(석공)이 꽤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농사나 직업에 종사하지만,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석축을 쌓은 일에 불려가거나 초청을 받았을 것이다. 공동체의 일이기에 돈을 받기보다는 자발적으로 땀을 흘리고 그 대가로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을 대접받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시골에서의 일은 돈보다는 기술이 더 유용하였고, 상부상조와 호혜의 미덕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공동체의 일은 동네 주민들의 모임을 통해 해결했고, 이를 통해 공동체 의식이 싹트고 두터워지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 어디에서도 주민이 함께 모여 석축을 쌓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석축을 쌓는 곳에는 한·두 대의 포크레인 기사가 적절한 임금을 받고 말없이 장비를 움직이고 있다. 그리운 풍경이 되어 버린 석축 작업. 석공의 사라짐은 공동체의 와해로 이어진다. 이러한 예에서 우리는 공동체의 와해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물질과 자본을 추구하는 흐름은 삶의 가치, 공동체 가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아파트 숲에 갇혀 자신만의 튼튼한 울타리를 둘러치고 곳곳에 CCTV를 설치한 도심에서 현대인은 연대보다는 고립을,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안위를 구축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런 속성을 파악하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지방소멸에 대응하고 구도심 재생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핵심은 ‘공동체 복원’이 아닐까. 공동체의 가치를 인식하고, 공동체에 관한 관심을 함양할 때 지속 가능한 도시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옛 공동체 건설에 있어 주역이면서 말없이 헌신했던 석공은 어디에 있을까. 그 많던 석공들은 어디로 갔을까. 비·바람에 돌마저도 깎여 나가는 세월의 비정함 속에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이 영속할 수 있겠는가. 시인(로빈슨 제퍼스)은 석공에게 경외심을 보이며, 시간의 장구함과 억겁의 세월을 견디는 바위를 바라보지만, 무심한 세월 속에 영원한 것이 있겠는가.
석공에게
대리석에 시간을 새기며 싸우는
패배가 예정된 망각의 도전자인 석공들은
냉소를 먹는다. 바위는 갈라지고,
장고의 세월을 견디어 빛바랜 글자는 부서져 내리며
빗물에 닳는다는 것을 알기에.
-로빈슨 제퍼스(Robinson Jeffers), ‘석공에게’ 부분
To the Stone-Cutters
Stone-cutters fighting time with marble, you foredefeated
Challengers of oblivion
Eat cynical earnings, knowing rocks splits, records fall down,
The square-limbed Roman letters
Scale in the thaws, wear in the rain.
금강산 천 길 낭떠러지에 새겨진 글자를 보았다. 단풍 위로 거대하게 드러난 붉은 글씨. 천 길 낭떠러지에 목숨을 걸고, 마음에도 없던 글자를 새겨야 했던 석공을 떠올렸다. 세월은 흐르고 그 글자를 새기던 석공은 사라지고, 독재자도 사라져갔다. 하지만 짧은 순간 분단의 벽을 넘어서 그처럼 활활 타오르던 불씨가 하루아침에 사그라들고, 남북을 잇던 다리가 그리 허망하게 끊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잠시 발을 들여놓았던 북한 땅은 두 번 다시 발 디딜 수 없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남과 북은 하나의 큰 공동체였다. 함께 만들고 연연히 이어가던 한겨레 공동체는 제각각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갈라진 두 쪽으로부터 하나의 공동체로의 복원은 이제 영영 불가능해진 것일까. 석공은 사라지고 질문은 이어진다.
집 주변과 동네에 보이던 석공들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생각나는 날,
남과 북을 오가며 대한민국의 담과 울타리를 함께 쌓는 일은 우리에게 언제쯤 가능할까-
우리의 다음 세대는 그 일을 하게 될까-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 박사
이메일 :imilto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