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사비 백제′의 숨결,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여계봉 선임기자

 

우리 역사에서 백제는 슬픈 이름이다. 백제를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이 시려 온다. 그래서 사비성이었던 '부여'는 아픈 땅이다. 멸망한 왕국의 종착역이었기 때문일까. 오층석탑이 있는 정림사 절터는 부여 읍내 한복판에 있다. 부여에서 가장 백제다운 모습이자, 백제의 혼이 오롯이 농축되어있는 국보 제9호인 정림사지(定林寺址) 오층석탑은 최근 낮추어진 담장 덕분으로 더욱 웅장하고 힘찬 모습으로 다가와 저절로 압도되는 느낌이 든다. 백제 유적지 가운데 유일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석탑은 어떻게 이 자리에서 천 년을 버티어 왔을까.

 

사비성 한복판에 자리했던 백제의 정림사지(복원도) 

 

정림사지 정문으로 들어서는데 바로 앞에 ′백제초등학교′가 보인다. 순간 묘한 느낌이 든다. 패망한 지 1,360여 년이 흘렀고 수많은 흔적이 사라진 지금 ′백제초등학교′라는 간판이 왠지 홀로 살아남은 백제의 후손 같은 느낌이 든다. 텅 빈 절터에는 오층석탑과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있는 강당 건물만 허허로이 남아 있다. 폐사지에 오면 늘 몸이 낮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가질 것도, 버릴 것도 더 없어서일까. ‘폐허의 미’는 상실감 대신 오히려 깊은 충만감을 준다. 멀리서 보이는 오층석탑의 비례미가 뛰어나면서도 부드럽고, 군더더기 없는 조형미는 볼 때마다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백제금동대향로와 함께 가장 부여의 백제다운 혼의 결정체로 꼽힌다.

 

‘폐허의 미’가 돋보이는 정림사지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웅진에서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서·남·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羅城)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옛 영화는 간데없고 아련한 흔적만 남은 절터의 가운데를 걷노라면 너른 절터에는 기둥을 세운 흔적과 건물 흔적들이 뚜렷하다. 이쪽이 금당이었을까, 그렇다면 이쪽은 아마도 석불 자리였을 터다. 폐사지에 들어 사라진 절집과 석불들을 상상의 나래를 펴서 이리저리 마음대로 지어본다.

 

오층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 있는 백제 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는 유물이다. 유홍준의 표현처럼 정말 늘씬하게 뻗어 올라간 상승감과 적당한 기울기를 지닌 추녀 끝 곡선은 그 자체가 부드러운 아름다움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세월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되어 보인다.

 

백제의 혼, 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가 망한 것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서였다. 사비성은 당나라 군대에 의해 쑥대밭보다 처참한 지경으로 변했다고 한다. 사비성이 7일 밤낮을 타서 성안에 살아남은 생명체가 하나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니까 그 상황이 어찌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백제인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긴 오층석탑도 망국의 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즉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석탑 1층 하부에 소정방(蘇定方)의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이 낙인처럼 새겨졌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8글자는 백제의 슬픔과 아픔의 정점이자 망국의 시린 감회가 담겨있는 통한과 탄식의 절창이 된 것이다. 패망으로 백제 당시의 절 이름이 기록에서 사라지는 바람에 오층석탑은 부끄러운 국가의 치부를 탑신에 새긴 채 오랫동안 ′평제탑(平濟塔)′으로 잘못 불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발굴조사 때 나온 기왓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년) 당시 정림사로 불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탁본(정림사지박물관 제공)

 

폐사지에 가면 늘 마음이 저절로 스산해진다. 드넓은 절터에 수백 년 묵은 고목이 마른 가지를 떨어뜨리고, 오래된 기왓장과 석물들이 어지러이 놓인 모습에 잠시 폐허의 슬픔이 밀려온다. 그렇지만 단청 화려한 건물에 금색 빛나는 불상을 모셔 놓은 절집에서 느낄 수 없는 처연한 정서가 있고, 고요한 절터에는 사색으로 이끄는 침묵이 있다. 그래서 부처 대신 절터에 버티고 선 오층석탑은 마치 묵언수행(默言修行)의 표상처럼 보인다. 천 수백 년을 버텨온 비결이 부동의 묵상에 있었음을 암시할 따름이다. 탑은 그냥 돌이 아니다. 옛날 사람들은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빌었다. 수많은 민초들의 염원이 서린 탑은 부처나 다름없다. 

 

백제 시대 당시의 정림사(정림사지박물관)

 

오층석탑 뒤쪽에는 백제 시대의 강당을 복원한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그 안에 삐뚜름한 돌 모자를 쓴 석불좌상이 빙긋이 웃고 있다. 이목구비 등이 뚜렷하지 않고 형체만 살린 조금 어설퍼 보이는 느낌이다. 석불은 고려 시대에 만든 비로자나불인데 돌 모자는 맷돌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오층석탑 뒤쪽 강당에 모셔진 고려 시대 석불좌상

 

정림사지에서 나와 고란사 나루에서 백마강을 거슬러 구드레 나루까지 왕래하는 황포돛배에 몸을 싣는다. 백마강은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의 다른 이름으로,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란 뜻이다. 길이 400여㎞의 금강이 공주에 이르러 금빛 비단 강이 되고, 남쪽 부여로 들어서며 백마강으로 불리며 낙화암 아래로 흐르고 또 흐른다. 백마강 물줄기를 따라 오르다 구드레 나루에 내려서니 붉은 강과 하늘이 이내 황금빛으로 빛난다. 

 

낙화암 아래로 무심하게 흐르는 백마강

 

종일 백제의 고도 부여를 떠돌아다녀도 백제의 향기를 맡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정림사지 오층석탑에서 사라진 왕국의 가녀린 숨결을 느낄 수 있어 다행스럽기 그지없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3.11.28 08:27 수정 2023.11.28 09:31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여계봉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