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석 칼럼] 업경(業鏡)

허석

상두꾼 선소리가 처연하게 들려온다. 요령을 칠 때마다 장강채 위의 종이꽃들이 몌별을 몸짓하듯 하얗게 나부낀다. 젊은이가 없어 또래 노인들이 대신한 상여꾼들의 만가는 삶과 죽음의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듯 더없이 구슬프다. 몇 개의 만장들이 흐느적거리고 식구들의 허물어진 곡소리가 후렴처럼 뒤따른다. 하늘 가는 길에 아버지는 꽃상여를 원했다. 이승에 외로움이 많았던 인연 탓에 작고 소박한 상여라도 답청하듯 위로받고 싶다고 했다.

 

어렸을 때는 상여를 보는 것이 무서운 일이었다. 해가 훤한데도 그곳은 어둡고 시커멓게 보였고 여름 더위에도 춥고 차갑게만 느껴졌다. 끈적대는 습기가 뒷덜미를 당기거나 검은 상복들이 빚어내는 죽음의 그림자들이 발목을 붙잡을 것 같았다. 아마도 죽음이란 상상이 두려웠을 것이다. 가깝거나 정들었던 사람이 떠나고 난 뒤부터 비로소 그런 구애한 기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임종 시, 붙잡고 있는 손의 온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이것이 죽음이구나.’ 하고 직감할 수 있었다. 추상도, 사변도 아니었다. 죽음이라는 누군가의 존재가 이 공간에 버티고 있어서 대항할 수 없는 무력감과 불가항력의 위압감이 엄습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살아있는 자의 두려움일 뿐이지 정작 죽음을 맞이하는 망자는 편안히 잠든 모습이었다. 다만 깨어나지 않는 잠이고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의 통고에 아버지의 마지막 눈길은 무척 허망한 표정이었다. 죽음의 순간까지 삶에의 미련을 버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슬프고 괴롭더라도 살아있다는 사실이 좋고, 돈이며 지위며 명예며 다 버리고도 조금 더 살고 싶은 욕심이 인간의 본능이다. 유현(幽顯)의 경계선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자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삶에 대한 애착보다 죽음 뒤의 허무가 싫었던 것은 아닐까.

 

네 살배기 손자는 아픔과 슬픔은 알아도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삶의 무상을 눈치채면 그것도 알게 될까. 존재한다는 것은 한시적인 현상이다. 탄생은 필연이지만 죽음은 선택인 것처럼 흔히들 간과한다. 오늘이 아니라 먼 훗날의 일이라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태연히 믿는다. 하지만 연기(緣起)처럼, 삶이 당연한 것이라면 죽음도 자연스러운 일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느 절이었다. 박물관에 업경대(業鏡臺)가 전시되어 있었다. 꼬리를 치켜든 사자상 위에 황색의 둥근 거울이 있고 그 가장자리에 붉은 화염이 불타오르는 문양을 투각 장식으로 표현한 조각품이었다. 업경대에 따라 새, 개구리, 만명, 연꽃, 소 등을 묘사하기도 하는데 죽은 사람의 업을 보여주는 의미라고 한다. 죽은 후 삼십오 일째 염라대왕의 심판, 명부(冥府)의 죄업을 비춰본다는 이 거울은 망자의 선악을 심판하는 불교의 법구이다.

 

신자도 납자도 아니면서 가끔 사찰을 찾는다. 인간의 마음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데 따라 괴로움도 되고 슬픔도 된다지만 하심이니 방하니 해도 원망과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신처럼 완벽하지도 않지만, 자연처럼 무심하지도 못해서 그저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것이 인간의 나약함이고 약점이다. 시시때때로 출렁이고 쏟아지고, 뜨겁게 끓어올랐다 차갑게 얼어버리기도 하는 마음이 곧잘 육번뇌(六煩惱)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게 한다. 법당을 들랑거리는 승려나 불자들은 무엇을 기도하고 간구하는지, 생사의 이치라도 깨달은 듯 눈빛이 순하고 간이(簡易)하다.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위로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죽음의 순간이 오면 그때 서야 삶이 명징하게 다가온다고 한다. 얼마나 각다분하고 바장이는 날들이었는지, 무엇 때문에 거미 치밀어 응어리진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후회가 앞선다. 왜 지나온 날들에 더 많이 행복하고 기뻐하며 살지 못했든가. 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뒤로 미루면서 하고 싶은 일에만 목매달았던가. 왜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보다는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감으로 괴로워했던가. 왜 내 곁에 있는 소중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먼 곳의 무지개에 현혹되어 살았던가. 

 

아버지의 기제사 때였다. 제를 지내고 음복하려는데 제상 아래 어머니가 몰래 넣어둔 쟁반 하나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 뜻밖에도 하얀 쌀이 편편하게 깔려있었다. 무속이긴 하지만 아버지의 환생된 형상이 무엇인지 궁금했었나 보았다. 자식 된 도리로서야 부디 선업을 받아 인도 환생하기를 바랄 뿐이지만 주술 같은 어머니의 행동에 실없다는 듯 속으로 웃고 말았다.

 

업경대가 꼭 저승에 있는 거울을 뜻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회개하고 참회하며 현존의 삶을 바른길로 다듬어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겉모습도 어려운데 자기 속을 정확하게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생긴 그대로, 방향도 정확하게 보는데 정작 ‘나’라는 존재는 평생 제 모습조차 스스로 보지 못하며 살 수도 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 되기 위해서는 부끄러움 없는 양심과 겸손만이 제대로 자신을 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나는 어떤 모습일까. 전생이 의심나면 현생을 보고 내생이 궁금하면 지금 나의 행적을 돌아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헛된 명성에 눈멀고 내 능력 밖의 일 때문에 부대끼지나 않았는지, 다칠세라 손해 볼세라 전전긍긍은 하지 않았는지, 이웃에게 무심코 갖게 된 오해나 편견들은 없었는지, 나 스스로에게는 관대하였어도 다른 이에게는 냉정하고 단호한 적은 없었는지 한 번쯤 되돌아보아야겠다. 아둔한 중생이야 알게 모르게 많은 악업을 저지르며 사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잘 살아왔을까. 지금 잘살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삶 그 후를 지금 삶에 넣어보면 훨씬 삶의 폭이 넓어질 것 같다.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3.11.28 08:57 수정 2023.11.2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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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