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급스러운 브랜드 옷 속에 숨겨온 천박한 개념을 들키는 건 순식간이다. 갑작스럽게 축적된 자본은 가슴 깊숙이 틀고 앉아 있던 욕망의 괴물을 깨우면서 백화점에서, 외제차매장에서, 강남 아파트에서 용처럼 날아오른다. 그뿐이던가. 그 욕망의 괴물은 조선팔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먹잇감들을 사냥한다. 그렇다. 욕망은 시시각각 자본의 울타리를 넘어 썩은 고기를 찾아 떠나는 하이에나가 된다. 천박한 욕망은 소비기계로 둔갑해 시장경제를 돌리는 힘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정신적 재앙이자 오만한 자본중독자라는 것을.
개념에 밥 말아 먹은 졸부들의 노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면 복장이 터진다. 자본이 널려 있는 도시에서나 놀면 됐지, 뭣 하러 저 바다 끝 오지에 있는 섬까지 가서 돈 자랑 옷 자랑 땅 자랑하며 불쌍한 동물들 잡아먹는지 모르겠다. 섬이 세상의 전부인 염소들은 자연처럼 살아가는 게 다다. 바다와 바람과 햇살과 맛있는 풀이 있는 섬에서 근심 없이 살다가 자연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리가 전부다. 원래 염소는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것이라며 한심하다는 듯 질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 맞다. 잡아먹으려고 키운다. 근데 젖도 안 떨어진 아기염소에게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있었다면 어미 염소를 잡아먹는 건 할 짓이 아니다. 그건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질 않은가. 이봉수 시인의 ‘아기염소’를 읽으면 내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외딴섬 오곡도에는
아기염소들이 산다.
지난 동짓달에
서울 사는 여편네들이
어미를 중탕해서 먹고 난 후
새끼들만 남았다.
음매 하면서
불렀더니
목청을 높여
음매 에헤헤헤헤헤
달라붙는다.
모두 젖먹이들이다.
아침 바다에 일출이 장관인데
서쪽 하늘 나뭇가지엔
지지 못한 아침 달 하나
눈물짓는다.
서울 사는 여편네들의 자본은 섬에서 치사하게 소비된다. 서울에서 온갖 산해진미를 즐기고도 남을 텐데 섬에까지 와서 젖먹이 아기염소를 둔 어미 염소를 잡아먹어야 직성이 풀린단 말인가. 이 천박함은 자본이 낳은 욕망의 산물이다. 못 먹어서 죽어가던 시절도 아닌데 몸에 좋다는 것 하나로 아무 거리낌 없이 아기와 어미를 갈라놓는 일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행해지는 맹목적 소비다. 그렇다. 자본은 소비를 낳고 소비는 중독을 낳는다. 음식에 중독되고 섹스에 중독되고 쇼핑에 중독되고 생명 경시에 중독된다. 이 사회적 병리 현상이 어디 서울 사는 여편네뿐일까.
이봉수 시인은 ‘아기염소’라고 염소를 의인화했다. 동물이니까 ‘새끼염소’가 맞는 말이지만 굳이 ‘아기염소’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생명을 중시하는 생명사상을 엿볼 수 있다. 자연은 그리스 말로 ‘피오마이’라는 동사에서 유래했다. 본래 ‘생성’을 뜻한다. 동양에서는 스스로 그러한 것을 자연이라고 한다.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라는 탈레스의 말처럼 아기염소도 신이며 나도 신이며 바다도 신이다. 이 세상에 신이 아닌 것은 없다. 범자연주의자는 아니더라도 아기염소가 울면서 빤히 보고 있는데 엄마염소를 끌고 가 중탕해 먹는 야만적인 짓은 욕망의 노예가 된 자본주의자들의 천박함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루이뷔통 핸드백에 처넣은 개념을 자랑스럽게 으스대며 한바탕 섬을 휘젓고 다녔을 여편네들의 잔상이 섬 구석구석 남아 있는 듯하다.

음매 하면서
불렀더니
목청을 높여
음매 에헤헤헤헤헤
달라붙는다.
모두 젖먹이들이다.
아기염소들이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했으면 사람이 부르는데도 의심하지 않고 음매 에헤헤헤헤하며 달라붙겠는가. 이미 중탕이 되어 서울 사는 여편네들 뱃속으로 들어간 엄마염소는 저 젖먹이들을 두고 눈을 감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서울 사는 여편네들은 뽀얗게 잘 우러났다고 좋아하며 아침저녁으로 먹는 염소탕에 만수무강을 기원했을 것이다. 엄마 잃은 아기염소를 위로해 주는 건 시인뿐이다. 시인은 저 외로운 섬 오곡도에서 아기염소의 엄마가 되었다가 바다가 되었다가 섬이 된다. 그렇다. 그곳의 자연은 방문하는 곳이 아니라 그냥 집이다. 마음의 집이며 정신의 안식처이다. 그곳에는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어야 한다. 스스로 그러함만 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여성들이 리더가 되는 세상이다. 한갓 여편네가 아니라 당당한 리더로서 여성의 품격을 보여주는 시대에 자본의 천박함 따위는 이제 벗어버리자. 위대한 모성을 가진 여성이 젖도 안 떨어진 아기염소의 엄마를 중탕해 먹는 야만적인 짓은 이제 그만두자는 시인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일 것이다. 사랑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내 생명이 귀하면 남의 생명도 귀한 것이 사랑 아니겠는가. ‘서쪽 하늘 나뭇가지엔 지지 못한 아침 달 하나 눈물짓지’ 않게 우리의 사랑을 보여줄 때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