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 바람 잘 날 없는 세상이다. 갑진년 용의 해 새해 벽두에 일어난 사건 사고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헌해 건 새해 건 사건들이 점처럼 모여 시간을 이루고 삶을 이루는 것은 틀림없지만, 올해 새해처럼 정치적인 사건으로 국민을 놀라게 하는 일은 드문 일이다. 지방을 방문 중인 여당 대표와 야당 대표의 행보가 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야당 대표의 피습사건이 국민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있다. 눈이 있으니 볼 수밖에 없고 귀가 있으니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 문명사회의 폐단이라면 폐단이다. 올해는 공적인 스트레스 좀 받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올해는 삶이 방전되지 않도록 살아야겠다. 늘 달라지겠노라고 결심하지만 뭘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에 대한 것은 막연하다.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일상에 지치고 머리는 텅 비어가는 것 같다. 목적도 없이 그냥 무의식적으로 손에서 놓지 못하는 스마트폰에 노예가 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손을 본다. 방전된 자신을 충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그 시대를 만나고 시인을 만나고 시인의 마음을 만나면서 충천하는 것이 가장 나에게 잘 맞는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이 비겁하고 졸렬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조금이라고 덜어내는데 이만한 방법이 없다.
오늘은 천오백여 년 전 시인 최치원을 만났다. 최치원을 시인의 범주에 가두기는 좀 아까운 면이 있다. 그에게 달라붙은 수식어는 다 빼고 인간 최치원과 그의 시를 만나 시간여행자가 되었다.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유일한 고독이 유지되는 공간에서 그의 속살과 나의 속살이 서로 나누는 특별한 시간을 누렸다. 역사 속 인물을 만나는 일은 지금의 나와 과거의 그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위험한 상대주의 늪에 빠지지 않고 사유를 공유하는 것이다. 참 어렵고 난해한 일이지만 일단 재밌다. 저 뻔한 정치적인 술수들을 보는 스트레스가 없어서 좋다. 정신적 단식으로 허기진 내 영혼에 맛있는 시의 밥을 먹는 즐거움이다. 나도 최치원처럼 오늘 밤 ‘바다에 배 띄우고’ 고독한 사유놀이나 해보는 거다.
돛 달아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 만리에 나아가네
뗏목 탔던 한나라 사신 생각나고
약 찾던 진나라 아이들도 생각나네
해와 달은 허공 밖에 있고
하늘과 땅은 태극 가운데 있네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니
나 또한 신선을 찾겠네.
성공한 최치원이 다 쓰러 가는 신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귀국하던 배 안에서 읊었던 이 시는 복잡미묘한 생각이 곳곳에 스며있다. 선진국인 당나라가 어떻게 일류가 되었는지 연구한 결과물을 가지고 가서 신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해 부푼 꿈을 안고 귀국한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닌 걸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을 것이다. 한류의 원조이면서 특별한 콘텐츠를 갖고 있는 최치원에게 신라는 어떤 문을 열어줄까 하는 기대도 있었겠지만, 은수저 6두품의 한계는 여전히 그의 발을 붙들고 있었다. 고국에 돌아왔지만 다 쓰러져가는 신라는 여전히 기득권들이 권력놀음에 빠져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여행의 자유를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가끔 나가는 해외는 늘 불안하다.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물설고 낯선 것이 타국이다. 타국에 가서 그 사람들과 경쟁하여 성과를 내는 일은 지금도 어려운 일인데 천오백여 년 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던 최치원은 어떠했을까 짐작이 가지 않는다. 신라에 당나라 유학 열풍이 불던 837년 한 해에만 216명이 유학길에 올랐다고 하니 선진국인 당나라 유학은 출셋길이 보장된 엘리트 코스였나보다. 당나라로 떠나는 배 위에서 아들을 보내며 부모들은 “돌아와서 십 년 안에 과거급제를 못 하면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마라”고 했다는 걸 보면 유학조차 못 가는 사람들은 그냥 쩌리로 살아야 했을 것이다.
다이아몬드 수저도 아니고 금수저도 아니고 6두품 은수저인 최치원은 “남이 백의 노력을 하면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고 할 만큼 죽기 살기로 공부해 유학 6년에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했다. 그냥 합격이 아니라 1등 합격이었다. 열두 살에 조기유학 가서 열여덟 살에 이룬 업적이다.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다. 그러나 공무원 시험에 합격은 했지만 2년간 자리가 나오지 않아 서류대필 일도 하고 저술활동을 하면서 겨우 끼니를 때우며 지냈다. 이때 많은 시를 썼다. 2년 뒤 첫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회남 절도사 ‘고변’이라는 사람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무렵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최치원은 ‘토황소격문’을 써서 황소를 무릎 꿇리고 이름을 떨쳤다.
스물여덟에 당희종이 내리는 국서를 가지고 귀국해서 신라의 헌강왕에게 바치고 이런저런 벼슬을 하지만 당나라에서 잘 나가던 최치원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방 관리로 떠돌다가 은퇴하고 전국을 주유하며 시를 짓고 저작 활동하면서 유유자적했다. 사상가이자 개혁가이며 문장가인 최치원은 종교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한 인본주의자이며 평등주의자로 유교 불교 도교를 연구해 종교의 통합을 이루고자 했던 최초의 종교통일의 창시자다. 그의 속살은 뽀얗고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강하고 튼튼한 구릿빛이다. 치열하게 살았던 증거다. 아름답게 산 증거이며 넓고 깊은 마음의 깊이를 지닌 증거이다.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니
나 또한 신선을 찾겠네
그는 아마 그가 지향하는 이상향으로 가서 신선이 되었을 것이다. 이 바람 잘 날 없는 세상에서 최치원을 읽는 밤이라도 없었다면 참 허전했을 것이다. 기껏 스마트폰 세상에 빠져 허우적이다가 아침을 맞이할지 모른다. 그도 아니면 밤새 처박혀 자다가 의미 없이 뜨는 태양에게 괜히 눈 흘기며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만 해댔을지 모른다.
‘고마워요. 고운’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