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우이령 너머 겨울 산사 가는 길

여계봉 선임기자

우이령 너머 산사(山寺) 가는 길은 겨울을 입고 있다. 산사 가는 길에서 만나는 자연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들려주는 크나큰 스승이다. 특히 겨울 산사 가는 길은 자신이 매 순간 살아 있음을 오롯이 느끼며 자각할 수 있는 도(道)의 길이기도 하다. 

 

우이역에서 내려 우이령을 오른다. 오늘 찾는 우이령 석굴암은 도봉산 오봉 바로 아래에 있다. 고요한 침묵 속에 고즈넉이 앉아 있는 절은 한 권의 시집이다. 절에는 시가 있다. 시(詩)란 말씀 언(言)자와 절 사(寺)가 결합된 단어다. 절에서 수행하는 구도자의 탈속한 언어는 바로 시가 된다. 그래서 산사 가는 길은 한 편의 시 같은 서정(抒情) 넘치는 길이다. 

 

우이동 계곡에 들어서자 우이령을 오르는 골짜기는 깊고 어둑하다. 빛깔도, 움직임도, 소리도 모두 지운 채 적멸처럼 잠잠하다. 계곡의 물길은 꽁꽁 언 얼음장으로 변한 채 흐르는 소리조차 기척 하지 않는다. 온통 계곡을 메우고 있는 눈 덮인 바위들 사이로 얼어붙은 얼음장 아래에서 들려오는 여린 물소리가 겨울 산의 적막을 깨우려 하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나무 그림자 내린 산길은 맑은 한지처럼 순수하다. 산길이 해맑아 온몸으로 산과 섞인다. 여기에는 그 어떤 욕심도, 고뇌도, 번뇌도 없다. 그저 그 자체로 무구하고 아름답다. 

 

겨울 산사로 가는 우이령 길

 

순백의 눈길에 눈 밟는 소리와 발자국을 남기며 느릿하게 걷는다. 마음을 수시로 어지럽히곤 했던 색깔들이 다 지워진 무채색의 길을 걷다 보니 서산 대사의 ′답설(踏雪)′이 떠오른다. ′눈 쌓인 길 갈 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자취가 뒤에 올 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

 

고요한 겨울 산골짜기는 이미 법당인가. 세속에서 담아온 번뇌가 애틋해진다. 골바람이 달려와 숲을 흔드니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세월에서 묵은 때, 저자에서 얻은 먼지만 남는다. 산길은 소귀(牛耳)처럼 길게 이어진다. 그동안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간 마음의 술렁거림이 보인다. 나그네를 따라오던 여린 물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숲의 적막 속으로 사라진다. 안온한 겨울 햇살에 몸을 맡긴 산자락은 산사 찾는 이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오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오봉

 

바로 앞에 법복 차림의 노 보살 두 분이 오순도순 말을 주고받으며 산길을 오르고 있다. 평탄치 않은 산길을 걸머메고 둘러메고 꾸부정꾸부정 산사를 찾아가는 노(老) 보살님들을 보면 불자의 진지함이 뚝뚝 묻어난다. 우이령 고개를 지나고 삼거리가 있는 유격장에 도착하자 잠든 영혼을 깨우고 지친 마음에 쉼표를 그려주는 산사의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온다. 마지막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산길이 끝나는 곳에 하늘 가린 나무들의 차양이 물러나며 동트듯 산기슭이 훤해지는데, 거기 도봉산 관음봉 바로 아래 청명한 둔덕에 석굴암이 숨어 있다. 

 

잔설로 치장한 석굴암은 찬바람 속에서도 암자의 뜰에 하오의 햇살이 나뒹군다. 금싸라기처럼 눈부시게 차가운 늦겨울 산사에 온기가 배어든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석굴암 나한전의 자연동굴 안에 나한들이 많이 모셔져 있다. 고려 말 나옹화상이 이 굴에서 정진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돌로 빚은 나한들의 표정들이 하나같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관음봉 아래에 숨은 암자 석굴암

 

스님은 참선에 들었는가. 텅 빈 듯 고요한 산사의 하오가 미묘하다. 도봉산 오봉 가슴께에 살포시 안긴 암자의 기운이 싱싱하고 다사롭다. 서슬 퍼런 한풍(寒風)도 이곳에서는 순해진다. 절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래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절집이 산에 있음은 얼마나 적실한가. 바람처럼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 절이다. 드센 찬바람에 대웅전의 문풍지가 소리 내어 울고 있다.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번거롭고, 마음이 밝으면 세상이 밝다. 가는 눈발에 꽃비처럼 너울너울 흩어져 내리는 눈은 절집 마당에 떨어지고, 법당 지붕에 앉고, 바위에도 쌓인다. 지극한 정교함과 절묘한 여백의 미가 완연한 바위 벼랑들이 눈과 한파 속에서 어엿하게 절집을 수호하고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전각들은 마음을 비운 듯 허허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 속에서 절집은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내공으로 한겨울을 견딘다. 저마다 견뎌온 세월의 겹이 두터우니 그 안에 담긴 사연은 또 얼마나 흥건하랴. 

 

인생(人生)이란 바로 이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한 조각의 구름이 아닌가. 일순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순간 사라져버리는 것들. 고정된 실체가 없이 찰나생멸(刹那生滅) 하는 이 세상에서 단지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갈 뿐.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그렇게 잡으려 하는 것들에서 괴로움은 시작되고, 붙잡고자 했던 것을 놓음으로써 행복이 얻어진다고 했는데 행동이 잘 따라주지 않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햇살 내려앉은 대적광전 빈 뜰에 서서 북한산 봉우리와 상장능선을 바라보니 눌린 생각들, 잠겨진 꿈들이 슬금슬금 풀린다. 한 올 바람처럼 머리가 가벼워진다. 적멸(寂滅)이란 모든 번뇌의 불이 꺼진 곳. 그렇다면 여기서 적멸이 멀지 않은 것인가. 산사에서 내려와 우이령 산길로 돌아 나오니 하늘은 어느새 푸른 빛을 띠고 있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4.02.14 10:07 수정 2024.02.14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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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