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갑사(甲寺) 가는 길

여계봉 선임기자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5월의 계룡산 산하는 연둣빛으로 물든다. 새로 돋아나는 파릇파릇한 이파리가 가득한 숲은 더없이 맑고 싱그럽다. 이 신록은 봄의 절정에서 머지않아 다가올 초여름의 전주곡으로 여겨진다. 

 

계룡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공주 갑사는 중장년층에게는 실제 가보지 않았어도 낯설지 않고 언젠가 가본 듯한 느낌을 주는 친숙한 절집이다. 그 이유는 1970∼80년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수필 ′갑사 가는 길′ 때문이다. 동학사에서 갑사로 가면서 만나는 금잔디고개 어름에 서 있는 남매탑의 전설을 소재로 쓰인 이 수필은 감수성 예민한 10대 소년, 소녀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안겨줘 오랫동안 뇌리에 스며든 것이다. 

 

갑사 가는 오리 숲길

 

갑사는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 근처에 있는 마곡사와 더불어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 불리지만, 봄의 신록이 빚는 정취도 그 못지않게 빼어나다. 우리 땅에 신록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냐 마는 단풍이 좋으려면 활엽수가 많아야 하고, 그러면 당연히 신록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신록과 단풍을 이처럼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갑사 초입에 있는 당산목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으로 드는 숲길에는 수령 150년 이상 되는 고목들이 늘어서 있는데, 갑사로 드는 이 길은 ′오리(五里) 숲′이라고 불린다. 들머리부터 경내까지 느티나무, 팽나무, 갈참나무 등 활엽수가 가득 찬 숲길이 5리(약 2㎞)나 이어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 이 길은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뤄 신록이 빚어내는 맑은 기운으로 녹음의 풍요를 자랑하고 있다. 이 숲은 계절마다 다른 매력을 자랑하는데 4월에는 흐드러진 황매화가 가득하고, 5월부터 여름까지는 햇볕을 가리는 신록의 숲으로, 가을은 불타는 단풍으로 갑사의 절경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갑사 수목 정원 너머로 보이는 계룡산 자연성릉 

 

오리 숲에서 금잔디고개까지 이어지는 깊은 갑사계곡 골짜기 바위 사이로 가슴이 후련하도록 물이 흐른다. 흐르는 물이 어찌나 맑은지 물속에 손이라도 담그면 속세에서 묻혀온 이 사람의 업보가 한 방울 떨구어진 먹물이 퍼지듯 번질까 감히 손을 담그기가 두려울 지경이다. 

 

가을에는 단풍으로 불타는 갑사계곡 

 

오늘 걷는 오리 숲길은 나무마다 새순이 돋고 여린 잎이 볕을 받아 오글거린다. 신록으로 가득한 대지에는 생기가 돈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하다. 수필가 이양하는 ′신록예찬′이라는 수필에서 이 느낌을 ″사실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라고 표현했다. 오리 숲에서 발산하는 영롱한 연둣빛은 ′힐링′이 되고 위안이 된다. 

 

백제 고찰 갑사. ′갑(甲)′자를 쓰는데도 마곡사의 말사다.

 

오리 숲길이 끝나는 사천왕문을 지나 산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중 나오는 게 언덕 위에 올라앉은 범종루다. 갑사는 육십갑자의 으뜸을 뜻하는 ′갑(甲)′ 자를 쓰는데 15동의 불전과 승당, 부속전각을 거느린 당당한 절집이지만, 뜻밖에도 마곡사에 딸린 말사다. 이른바 ′수말사(首末寺)′라 해서 말사 중의 으뜸이라고는 하지만 서운한 감정을 떨칠 수 없다.

 

갑사에서 동학사로 넘어가는 산길

 

군데군데 법당 주변에도 수채화 물감 같은 연두색이 번져 나가고 있고 대웅전 마당에는 머리 위로 연등이 별처럼 떠 있다. 햇살이 드는 계곡과 신록, 그리고 연등으로 치장한 암자들로 어우러진 산사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형형색색 연등으로 치장한 절집 마당

 

공주 계룡산 계곡에는 갑사 너머 유명한 동학사가 있고,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고즈넉한 분위기가 일품인 논산에 인접한 신원사가 있다. 그리고 근처 사곡면에 있는 마곡사까지 공주의 절집 네 곳은 저마다 다른 봄날의 정취를 품고 있다. 하나하나 절집도 좋지만, 부처님 오신 달에 공주에 가서 이 네 곳을 한꺼번에 다 돌아본다면 더없이 의미 넘치는 힐링 여행이 될 것이다.

 

계룡산 자락은 빛을 응집시켜 둔 것 같은 영롱함을 머금고 있다. 푸르름을 만끽하며 산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 초목들이 내뿜는 싱그러운 기운으로 머리까지 맑아진다. 부처님 오신 달에 이 기운을 가슴에 담아 신록으로 물든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5월의 산과 내처럼 항상 푸르름을 안고 살아갔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지니고 신록과 연등으로 물든 절집을 내려선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4.05.13 10:35 수정 2024.05.13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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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