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릇파릇한 이파리가 가득한 북한산 숲은 더없이 맑고 싱그럽다. 오늘 걷는 북한산 둘레길에는 구름을 뚫고 뜨거운 햇살이 내려앉는다. 보리 이삭이 익어 누런색을 띠는 소만(小滿)이 지나가니 이제 여름의 문턱에 들어선 셈이다.
백화사 가는 길에 들어서니 의상봉이 송곳같이 예리하게 솟은 자태로 산객을 압도한다. 둘레길을 따라 내시 묘역을 지나 북한산성 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계곡 왼쪽으로 어머니 젖가슴같이 유순하고 편안한 봉우리가, 오른쪽으로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파른 봉우리가 산객을 반긴다. 하나는 정토종(淨土宗) 개창자 원효(元曉)대사의 현신(現身), 다른 하나는 화엄종(華嚴宗) 개창자 의상(義湘)대사의 현신이다.
두 봉우리 사이 북한산성 협곡에는 북한산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깨끗하고 차디찬 물이 역동적으로 흐른다. 통일 신라의 불교를 대표하는 원효와 의상, 서로 협력자이면서도 때로는 라이벌이기도 했던 두 거두의 치열한 논쟁을 식혀주는 냉각수임 셈이다.
같은 시대를 함께 살던 두 사람이 당나라 현장법사에게 수학하러 중국으로 가던 길에 일어난 원효의 일화는 유명하다. 한밤중에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신 후 아침에 일어나서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을 본 원효는 일갈한다.
"아하! 세상만사 유심조(世上万事 唯心造)라,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없고, 부정(不淨)도 없는 것을".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음을 크게 깨달은 원효는 더 이상의 유학을 포기하고 홀로 되돌아온다. 그 후 원효는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으리라."라는 노래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부르며, 스스로 군중 속에 뛰어들어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 이론을 민중불교로 바꾸는 노력을 하게 된다.
한편, 원효와 헤어진 의상은 당나라로 건너가 8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귀국한다. "오묘하고 원만한 법은 증명할 길이 없는 것으로, 인연에 따라 이룰 수 있다."라고 설법하며, "체제 속의 질서이론"을 체계화하여 귀족적 불교인 화엄종을 개창한다. 당시 신라는 통일 전쟁을 마치고 새로운 국가체제를 갖추어 나갈 시점으로, 원효의 ′자율성′이 아니라, 의상의 ′체제 질서이론′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터. 대중들은 원효의 사상을 신봉하고 따랐으나 지배층은 의상의 사상을 지지하고 받아들인다. 자연히 원효는 민중 속으로 떠돌게 되고, 왕실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은 의상은 해동화엄(海東華嚴)의 개조(開祖)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백운대 방향으로 오르다가 상운사로 오르는 산길로 들어서자 갑자기 경사가 급해진다. 우리나라 불교 고승 두 분의 체면도 있는데 친견하러 가는 길이 그렇게 녹녹해서야 될 법인가. 상운사를 지나고 20여 분을 코를 땅에 박고 오르면 북문을 지나 원효봉 정상에 이른다.
원효봉 정상에 서면 눈앞에 환희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한낮의 햇살이 북한산의 고산준령을 비추니 염초봉,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용암봉과 그 겹겹의 능선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녹음 사이로 군더더기 하나 걸치지 않고 속살을 드러낸 삼각산의 거대한 암봉들. 그것이 뿜어내는 신성한 기운. 웅장, 수려, 신비하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북한산 암봉 군(群)의 백미는 역시 백운대다, 인수봉, 만경대가 연출하는 신비로움, 이 세 개의 화강암 덩어리야말로 말 그대로 압권이다. 절묘한 위치 배열, 상아빛 거봉 세 개가 바위 뿔 모양을 하고 하늘을 떠받치듯 솟아있는 산. 그래서 ′삼각산(三角山)′은 참으로 잘 지은 이름이다.
우리네 이웃같이 부드러운 원효봉 정상에서 협곡 너머로 손을 내밀면 손에 닿을 듯한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의상봉이 있다. 톱니처럼 날카롭고 험한 산세는 철두철미, 용맹 불퇴의 전형인 의상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다. 그래서인지 대서문-의상봉-용혈봉-문수봉까지 약 3.5km의 성곽 구간을 잇는 의상 능선은 북한산에서 가장 까칠하고 걷기 힘든 능선길이다.
원효봉에 서서 의상봉을 오래 보고 있노라면 "귀신을 보고 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았다."고 갈파한 의상의 냉정한 통찰(洞察)을 느끼는지 정수리가 찡해지고 몸 전체가 저려오는 전율을 느낀다.
의상이 이성적이라면 원효는 감성적이다. 치밀하게 준비하여 목적한 바를 이루고야 마는 의상에 비한다면, 원효는 설렁설렁하다가 실수만 하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그런 원효이기에 역설적으로 민중의 마음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불계(佛界)와 속계(俗界)의 경계는 있기나 한 것인가. 틀에 얽매지 않는 원효의 자유로운 사상은 스스로 파계하여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로맨스를 만들어 아들 설총을 낳고, 방방곡곡 구름처럼 떠돌며 민중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설파한다.
의상봉 아래 국녕사의 국녕대불이 원효봉에서도 잘 보인다. 6.25 동란 전까지만 하더라도 의상이 참선하던 국녕사는 86간의 대찰이었다. 하산 길에 원효봉 아래에 있는 작은 절집 원효암에 들린다. 원효가 참선하던 원효암은 가건물 같은 작은 법당 하나와 판잣집을 겨우 면한 요사채 한 채가 원효봉 암벽에 의지하여 둥지를 틀고 있다. 절집 규모만으로 원효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과 의상의 '체제 속의 질서이론'을 단정하면 이는 지나친 비유일까.
산행을 마치고 들린 북한산성 상가에 있는 커피점의 2층 대형 유리창을 통해 의상봉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북한산 초입에서 변함없이 늘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봉우리 원효봉과 의상봉. 원효에게는 ′직관(直觀)′을 중시한 원효의 길이, 의상에게는 ′통찰(洞徹)′을 중시한 의상의 길이,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대립 속의 조화′를 지향하였을 것이라고 느껴진다.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두 봉우리에서 ′할(磍)!′ 하는 두 거두의 외침이 산자락까지 내려와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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