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진 칼럼] 배꽃의 꿈

허정진

읍내 뒷산 친구네에 가는 길에 배밭이 있었다. 요즘 과수원처럼 울타리나 살수기 같은 시설물도 없고, 여든여덟 번의 손이 가는 벼농사처럼 누군가 사시장철 계획적인 경작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잎눈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도 나무 스스로인 줄 알았는데, 가을 수확기가 되면 어김없이 주인이 나타나 터줏대감처럼 권리 행사를 하였다. 배나무 사이 언덕길에 얼씬거리거나, 떨어진 낙과 하나 눈길을 두었다간 행여 서리나 하지 않을까 의심받기에 십상이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날, 산골짝에서 명지바람이 불어오면 하얀 배꽃이 눈송이 나리이듯 온 세상에 너울거렸다. 새침데기 그녀의 까만 갈래머리에도, 나물 캐러 가는 품 안의 소쿠리에도 꽃잎들이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산등성에는 키나 모양이 각양각색인 나무들이 제 요량과 기운대로 멋스러운 골격미를 자랑하고, 잎파랑이 물오른 잎새들은 로망스 협주곡을 연주하듯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여유와 조화로움이 봄날 물오르듯 했다. 

 

추석이 다가올 무렵이면 어머니를 앞세우고 기세등등하게 배밭에 갔다. 명절 손님치레를 위해 한 광주리 주문을 해놓으면 주인은 비탈을 오르내리며 배를 따느라 손발이 분주해진다. 결실의 중량감에 가지마다 바지랑대로 받쳐놓았던 배를 까치발로 손을 뻗대거나 작은 나무 사다리로 발돋움하며 조심스럽게 따 내린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그 시원하고 달큼한 과즙의 맛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그리워하듯 막연한 아쉬움과 이야기를 품은 채 오래된 유년의 추억으로 남았다. 그것이 오래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배꽃이었다.

 

아치형 낮은 터널이다. 넓고 편평한 들판에, 비행장의 격납고 같은 쇠 파이프 구조물이 똑같은 모양으로 오열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가운데 통로는 사람이나 농기계가 지나다닐 수 있게 텅 비어있고, 땅으로 구부러진 터널 양쪽 가장자리에는 돌기둥 같은 잿빛 나무가 자로 잰 듯 앞뒤 정확한 간격으로 줄지어 서 있다. 어른 무릎께만큼 자라다가 좌우 쇠 파이프를 따라 날개를 퍼덕이듯 오직 양 갈래로만 휘어진, 사지가 찢어진 흉물스러운 모습의 배나무였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가지는 없다. 옆으로만, 밑으로만 향하도록 일찌감치 억제되고 전지되었다. 쇠 파이프 구조물의 각도와 형태대로 큰 줄기는 굵은 철삿줄로 옭아매어지고, 신경세포 망처럼 거미줄로 뻗어나간 잔가지들만 사방으로 어지러이 매달려 있다. 하늘은 촘촘한 그물망으로 둘러쳐져 더 이상 멧새들의 놀이터로도, 마실 가던 까치도 나뭇가지에 접근하지를 못한다. 자연물을 어떻게 렇게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 수가 있을까, 대단하기에 앞서 섬뜩함이 느껴졌다.

 

형틀이고 족쇄며, 포승줄에 묶인 노예의 형상이 따로 없다. 물 밖으로 드러난 가두리 양식장이 저러할 듯싶다. 허용되는 것은 오직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복종하는 일뿐, 자유로이 제 방향과 뜻과 의지대로 뻗어나가는 일탈은 용서받을 수 없다. 밀림에 살던 맹수들이 서커스 묘기를 위해 순종하고 조련되듯, 대지의 나무들도 주어진 재배 조건에 맞춰 분재처럼 구부려지고 뒤틀리며 순응하고 있었다. 박탈된 자유와 구속된 행복이었다.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어서인가. 낭만적 정서와 효율적 사고와의 간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벼를 보지 못한 도시 아이들이 나무를 그렸다는 무지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창공으로 자유롭게 퍼져나간 녹각 같은 가지와 무성한 잎들 사이에 보석처럼 감춰진 열매를 기대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무안하기 이를 데 없다. 과수원은 더 이상 동화 속의, 수채화 속의 옛 풍경이 아니었다.

 

경제 논리일 것이다. 과수원 운영이 재미나 놀이가 아닌 이상 최소의 비용과 최대의 수입에 골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손도 적게 들고, 작업도 수월해야 한다. 작은 흠집 하나 용납하지 않는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알도 크고, 모양도 번듯하고, 색깔도 예쁘고, 단물도 듬뿍 들어야 한다. 최상의 품질은 겉보기에 의해 결정될 뿐 누가,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길러냈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속도와 효율, 계산과 실리 앞에 낭만이나 신뢰감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른다. 케이지 속의 닭처럼 과수원도 과일을 대량 생산하는 공장과 다를 바 없게 된 모양이다. 

 

그래도 미련은 남는다. 무농약이나 유기농처럼 생물학적 영양분도 좋겠지만, 행복하게 자란 식물과 짐승들이 그것을 먹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든다는 정서적인 가치상승도 기대해 보고 싶다. 귀하고 비싼 음식보다, 착한 식당의 그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씨가 우리를 더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고 싶다. 편하고 빨라지고 모든 것이 풍족한 세상이지만 아직도 여전히 불안하고 부족하고 쫓기며 사는 것은, 그 삶의 여정과 순간들 속에서 느낌표와 감탄사들을 잃어버리고 살기 때문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꿈이 없는 삶이 아니었을까. 무엇으로 행복한지, 어떤 것이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삶인지 한 번쯤 되짚어 보지도 못하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세상이 정해준 관념과 관습에 얽매이고 성공과 출세라는 사회적 평점에만 목매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이 아닌데’ 하면서도 하고 싶은 일보다 해내야만 될 일이 많은 세상을 탓하며 구속과 속박의 틀에 스스로 노예가 된 것은 정작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되물어 본다. 

 

배꽃은 더 이상 꿈을 꾸지 못한다. 우리는 그 꿈이 없는 과일을 먹고 산다.

 

 

[허정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4.05.28 10:09 수정 2024.05.2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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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