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꽤 오래전의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 버지니아 남쪽 버지니아 비치에서 가족 여름휴가 중 휴가객들로 붐비는 한여름 저녁에 ‘비치보이스’가 온다고 하며 열광하고 있을 때 영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고 일만 하며 살던 내가 알 턱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고로 기껏 한다는 말이 ‘아 이런 비치에 보이들이 수없이 많은데 또 무슨 비치보이스가 온다고 야단들이냐?’고 생뚱맞게 말했다. 집사람과 딸아이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던 일이 40여 년 전 일이다. 요즈음 세상 돌아감이 하루가 멀다고 별의별 일들이 생겨나 정말 헷갈리는 세상인 것 같다.
한쪽에선 코로나 재확산 공포와 생활고에 시달리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선 너무 엄청난 재산에 무감각해졌는지 몇몇 수퍼리치 억만장자들이 우주여행 경쟁에 한창 열중하는 모습들이다. 그런가 하면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며 인공지능, 자율주행 전기차 및 배터리 산업, 빅 데이터, 클라우드, 로봇 산업 등 좀처럼 잘 이해되지 않는 용어들의 홍수인 지금, 이건 또 무슨 말인고! ‘메타버스’라나. 얼핏 듣기엔 비치에 웬 비치보이스가 나타난다고 야단들이냐고 할 때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메타버스는 ‘메타’라는 버스(Bus)가 아니고 영어로 ‘MetaVerse’라고 한단다. 초현실세계 혹은 초가상세계라는 것이다. 인문학에서 마치 형이상학적 세계와도 일맥상통하는 건 아닌지? 현실세계를 아날로그 지구, 물리적 지구라 하며 디지털화된 지구를 신세계, 가상세계라 한다. 나는 페이스북, SNS는 하지 않으나 카카오톡은 가끔 하는 편인데, 그러고 보면 나도 모르게 신세계, 가상세계에 이미 발을 들여놓은 게 아닌지, 격류에 발 한번 잘못 담갔다 물살에 휩쓸려 내려가는 꼴인 것 같다. 허나 두려워하고 거부하기보다는 이런 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배워 시대의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될 것 같다. 70~80세에 영어 배워 이민 가겠다는 우스운 노인네가 돼서는 아니 되나 100세 시대에 얼마를 더 살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메타버스가 메타라는 버스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는 노인네이기를 희망한다. 젊은이들이 뭐라 하면 ‘너희는 늙어봤냐? 우린 젊어봤다!’ 하는 여유를 보이고 싶다.”
한국일보 오피니언 칼럼의 필자 문성길 의사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메타버스’ 현실을 이렇게 실감한다고 적고 있다. ‘형이상학의 반대말로는 ’형이하학‘을 들 수 있겠지만 우리 현실과 실체 본질을 아날로그다 디지털이다, 육체다 영혼이다, 현실이다 초가상현실이다 분리할 수 있을까. 사이보그란 말은 옥스퍼드 사전 정의에 따르면 생물 본래의 기관과 마찬가지로,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기능이 조절 제어되는 기계 장치를 생물에 이식한 결합체로, 생물체계에게는 나쁜 환경에서의 활동을 위하여 연구되었는데, 현재는 전자 의족, 인공 장기 등 의료면에서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 ‘사이보그’는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보이는 하나의 생물 유기체와 기계 같은 무생물 무기체의 합성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미국 기업가로 페이팔의 전신이 된 온라인 결제 서비스 회사 x.com, 민간 우주기업 스페이스 X를 창립했고, 전기자동차 기업 테슬라의 초기 투자자이자 최고 경영자 일론 머스크가 지난 2016년 6월 2일 선언한 바와 같이 우리는 모두 ‘이미 사이보그’로 인터넷을 통해 ‘초연결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옛날 옛적부터 우리 동양에서는 ‘땅을 접는 법’이란 뜻으로, 같은 거리를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해준다는 가공의 기술이 회자 되어오고 있다. 자전거, 자동차, 비행기, 그리고 배와 풍선이 발명되면서 육지뿐만 아니라 바다 대양의 거리까지 축소. 단축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오늘날엔 우주와 다중우주의 공간도 축소, 단축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청소년 시절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대학을 졸업하든 1959년 당시 데이트하던 내 첫사랑 코스모스 아가씨와 서울 대한극장에 영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보러 갔었다. 2층 로비에서 다음회 상영시간을 기다리던 중 아가씨가 화장실에 안 가겠느냐고 묻길래 별로 갈 생각은 없었지만 코스모스 아가씨가 무안해할까 봐 같이 화장실로 향했다. 숙녀와 신사 화장실 입구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잠시 소변기 앞에 서있자니 퍼뜩 생각이 떠올랐다. 남녀 화장실 간의 간격은 몇 미터가 안 될 테니 이 공간을 단축시킨다면 우리 몸은 한 몸이 되겠구나. 이 순간 난 ‘축지법’ 아니 ‘축공법’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언제나 외롭지 않았다. 우주 공간을 한 점으로 압축하면 나는 만인 아니 우주 만물과 일심동체가 될 수 있으니까.
좀 더 생각해보면 생물 유기체와 무생물 무기체가 다른 것일까. 최근에 와서 인간장기이식수술이 일상화되었고, 의료수술과 가사노동을 로봇이 더 신속 정확하게 대행하게 되었으며, 믿거나 말거나, 섹스 파트너 로봇까지 등장하지 않았는가. 얼마 전엔 중국에서 DNA를 편집 조작한 쌍둥이까지 태어났다 하지 않나. 그뿐만 아니라 이심전심이니, 예지몽이니, 임사체험이니, 등 우리 지성이나 이성 영역 밖의 초감각인지현상 을 과학이 아직 설명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아, 그래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 경도 이렇게 장탄식했으리라.
“세상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난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좀 더 예쁘고 매끄러운 조약돌과 조가비를 줍고 노는 어린애일 뿐 진리의 대양은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내가 (남보다) 멀리 보았다면 거인巨人들의 어깨에 내가 올라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I do not know what I may appear to the world; but to myself I seem to have been only like a boy playing on the sea-shore, and diverting myself in now and then finding a smoother pebble or a prettier shell than ordinary, whilst the great ocean of truth lay all undiscovered before me..…If I have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또 어떤 선장船長은 그의 항해일지航海日誌에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오, 신神이여, 당신의 바다는 너무도 큰데 내 배는 너무나 작습니다.
O, God, Thy sea is so great and my boat is so small!”
숨을 쉬고 있는 생물 유기체이든 숨을 멈춘 듯한 무생물 무기체이든 코스모스 우주 안에 있는 만물은 모두 다 하나같이 대우주 코스모스의 축소본인 소우주 코스모스인 ‘나’ 자신, 곧 ‘사랑의 무지개 타고 태어난 코스미안’이어라.
얼마 전 인터넷에 용도폐기 고려 대상 목록이 떴다. 이론의 여지 없이 당연시 해온 여러 개념들이 이 목록에 포함되었다. 예를 들면 인간성, 원인과 결과, 자유의지, 실증된 약품의 효력 등 모든 것의 이론과 수많은 현대 사상이 있다. 출판 대리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문제 제기자인 존 브록맨은 그가 1998년 창설한 ‘엣지’를 통해 흥미로운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제기해왔다. 말하자면 증명할 수는 없지만 무엇을 당신은 믿는가. 인터넷이 어떻게 모든 것을 바꾸고 있는가. 당신의 어떤 생각이 바뀌었는가 등이다. 166명의 철학자, 사상가, 과학자, 작가, 예술인 등 서구사회의 최고 지성을 대표하는 인사들의 에세이를 요약해 12만 단어가 넘는 개론을 온라인 살롱 ‘엣지(edge.org)’에 올려 공개토론이 진행 중이다.
과학자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언제 어디서나 적용될 수 없는, 사실과 허구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고, 논리학과 수학자들이 옳고 그르다고 정의한 것도 상황과 형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죽음조차도 생명이 사라진 물체 몸덩이가 다른 물질로 변화해 다른 방식으로 생명이 이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인공지능’ 같은 것은 용도폐기해야 하지 않나, 심지어 인과나 무한 또는 우주 같은 개념이 없어도 좋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과학과 학문의 참된 요체는 믿음이나 진리가 아니고 의문이라는 각성을 촉발시키고 있는 것이리라.
우문이란 있을 수 없어
다시 말해 우리 모두 매사에
너무 곧이곧대로 융통성 없이
중차대한 막중대사로
지나치게 심각할 필요 없음을.
그 어떤 교리나 이론으로도
바람처럼 자유롭게 부는 삶을
무지개처럼 하늘에 서는 빛을
이슬처럼 맺히는 사랑의 꿈을
결코, 옭아맬 수 없다는 사실을.
돌아가는 지구가 둥글다면
동서남북 위아래가 어디며
네 왼쪽이 내 바른쪽인데
옳은 쪽 그른 쪽 없지 않나.
그러니 무위이화
무위지도 따르리.
여기서 우리 비틀즈의 노래 ‘Let It Be’의 가사(John Lennon과 Paul McCartney의 공동작사)를 음미해 보리라.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in my hour of darkness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when the broken-hearted people
Living in the world agr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For though they may be parted there is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Yeah,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
Shine until tomorrow
Let it be
I wake up to the sound of music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yeah, let it b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yeah, let it b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yeah,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사랑. 죽음. 그리고 미학-지리산에 가는 이유’라는 칼럼에서 필자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 간사는 ‘설산-운해는 바그너만큼 숭고하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에스트로 친구가 있다. 구자범 지휘자다. 그는 놀라우리만치 박학하고 예술적 감각이 선하며 여린 마음의 소유자다. 그가 지휘봉을 잡고 무대에 설 때의 카리스마는 가히 외경스럽기까지 하다. 한번은 지리산 산행을 떠나기 전에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사는 얘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가 그는 바그너 작품에 대해 평하기 시작했다. 바그너를 사상적으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바그너 작품의 몇몇 부분을 들으면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바그너 음악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숭고하다. 그것은 신을 대면한 사람이 느끼는 종교적 숭고가 아니라 음악 자체를 신성하게 만들어 놓은 숭고함이다. 바그너 음악의 과장된 격정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음악 문외한인 필자는 전문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헤어질 무렵 친구는 필자에게 말했다. 왜 산에 가느냐고 말이다. 이렇게 무더운 장마철에 힘들고 위험하게 왜 산에 가느냐고. ‘산이 있으니까 간다’는 누군가의 말을 인용해 답했다. 이미 진부해져 버린 이 말은 친구의 마음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그런 일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자주 발생한다. 상대의 표정에서 말의 진입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친구의 모호한 표정을 보는 게 안타까웠지만, 당시에는 좋은 해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임기응변이 신통치 않은 필자의 우둔함 탓이다. 그때 못한 답변을 여기서 해보기로 한다.”
그러면서 풀어 놓은 필자의 대답은 이렇다.
“공자는 인(仁)에 대한 물음에 각양각색으로 답했다고 한다. 대화의 맥락에 따라 묻는 사람에 따라 달리 대답해서 공통분모들을 통해 하나의 정의를 구성하는 것조차 어렵다고 한다. 예컨대 인에 대해 공자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애인’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라 말했고 어떤 때는 ‘말을 더듬는 것’이라 대답하기도 했다. 이들 대답에서 공통분모를 찾기는 힘들다. 공통분모를 발견해 나열하더라도 그것은 대개 김빠진 맥주처럼 맛이 없기 마련이다. 백과사전만 가지고는 절대로 타인에게 가 닿는 화법을 구사할 수 없다. 할 수만 있다면 공자처럼 질문한 사람에 대한 충분한 이해(그의 세계관, 습관, 지적 수준, 관심사 등) 속에서 답변하는 게 좋을 것이다.
복기를 해보면 친구의 질문에 대한 답은 그날 그가 꺼낸 단어 ‘숭고’를 열쇠말로 구성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친구가 바그너 음악에서 신성한 숭고를 느꼈고, 그래서 자주 바그너를 듣는다면 필자는 지리산에서 자연의 숭고를 체험하기에 그곳에 간다고 말이다. 통상 아름다움은 자연미와 예술미로 구분된다. 어떤 이는 자연미를, 다른 이는 예술미를 우위에 놓는다. 자연미를 우위에 놓는 전통적인 근거는 자연을 신의 작품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 예술미를 우위에 놓는 근거는 인간이 자연 초월적인 존재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숭고도 마찬가지다. 자연에서 더 큰 숭고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작품에서 더 큰 숭고를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 우열을 따지는 행위가 대개 유치하기에 그저 취향의 차이 혹은 경험치의 차이로 보는 게 낫다. 숭고 대상은 절대적으로 크고 강력하다는 느낌을 환기시킨다. 숭고는 불쾌감으로 시작한다.
엄청난 크기와 위력을 지닌 존재에게 짓눌리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공포다. 아직 숭고는 아니다. 공포가 강렬한 즐거움으로 전환될 때 비로소 숭고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전환의 계기에 대한 여러 학설이 있지만 에드먼드 버크에 따르면 두려운 대상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확신할 때 불쾌했던 감정이 유쾌함으로 변모된다. 공포 영화에 몰입해 강렬한 두려움이 일었다가도 ‘이건 가짜야!’라는 각성을 통해 가슴을 쓸며 안도했던 어릴 때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반면 자연의 숭고는 ‘진짜’ 위험하다.
그 숭고를 경험하려면 고된 노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인적 없는 설산이나 운해의 숭고를 경험하려면 악천후를 뚫고 두 다리로 걸어 입산해야 한다. 여러 안전장치를 마련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고되고 위험해도, 아니 그렇기에 그 체험이 더 리얼할 수밖에 없다. 더 강렬할 수밖에 없다. 그 경험을 통해 압도적인 타력에 대한 맨몸의 저항력도 생기며 무력한 이에게는 더욱 더 공감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술적 숭고가 따라잡기 어려운 미덕이다. ‘친구여, 이래서 난 지리산에 오른다네.’”
우와, ‘자연미’와 ‘예술미’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접해 본 그 어느 누구의 해설보다 명쾌, 상쾌, 장쾌하며 통쾌한 선언이다. 자연이냐 예술이냐, 아니면 삶이냐 예술이냐 또는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우리 다 함께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 좀 해보자.
세계 3대 경매회사 중 하나인 크리스티에서 인공지능(AI)이 그린 에드먼드 벨라미의 초상화가 43만 2,500달러에 팔렸다.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제작한 초상화가 경매에 나와 팔린 것은 그림 경매 250년 역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이미 인공지능이 소설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동안 의사나 법률가, 투자 상담사 등 고액의 보수를 챙기던 전문 직업인들이 전담하던 일도 인공지능이 더 정확하고 효율적이면서도 저렴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일찍이 아일랜드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버나드 쇼는 “모든 전문적인 직업은 일반인들을 등쳐 먹는 공작이다.”라고 갈파했듯이, 그동안 사회적 또는 문화적 경제적 특권층으로 재미를 톡톡히 보던 귀족들은 크게 한탄할 일이지만 우리 민초들은 쌍수를 들어 반겨야 할 것 같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와 로마의 웅장한 신전과 성당, 중국의 만리장성, 인도와 동남아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수많은 사찰 등을 위대한 문화유산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예찬하지만, 이것들을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노예와 (신부나 승려가 아닌) 인부들의 희생이 있었는가!
따지고 보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의 삶, 숨 쉬는 순간순간 이상의 경이롭고 기적 같은 ‘예술’은 없다. 그 이상의 ‘예술작품’이 결코 있을 수 없는데, 우리는 어찌 ‘모조품’에 불과한 그림자를 실물보다 더 애지중지할 수 있단 말인가. 꿈에서 인지 생시에서 인지 어디서 본 듯한 말이 떠오른다.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세상에 열심히 삶을 사는 ‘인생 예술가’ 말고 다른 예술가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
몇 년 전 직장 동료인 아랍어 법정통역관의 딸은 신혼여행 중 파도가 세게 치는 바닷가 바위에 올라 포즈를 취하는 신랑의 사진을 찍는 순간 파도가 덮쳐 남편을 일찍 잃고 말았다. 그러니 현실이 가상현실보다 훨씬 더 이상하고, 자연이 그 어떤 인위적인 업적보다 더욱 위대하다고 해야 하리라. 2007년에 전자책으로 나오고 2014년 개정판으로 다시 발간된 ‘플라멩코 이야기’가 있다. 고향인 마산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는 ‘카페 소사이어티’의 작가 김준형씨가 영어로 플라멩코와 판소리의 만남을 자전적 소설형식으로 쓴 ‘플라멩코 여정(Flamenco Journey)’의 한국어판이다. ‘역자의 변’에서 저자 김준형 씨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플리멩코 이야기는 글 속의 ‘나’, jh라는 이니셜의 한 여행자가 미국인 플라멩코 댄서 로레나(Laurena)에게 보낸 편지들의 번역문이다. 그가 스페인 여행 중에 그녀에게 보낸 이메일을 필자가 우리말로 번역하여 이에 살을 적당히 붙여 편집하였던 것이다. 이 글은 jh의 편지 모음이므로 엄격히 말해 그의 창작물이란 뜻이다. 필자는 단지 그의 편지들을 우리말로 충실하게 옮긴 역자일 뿐이다.”
스페인의 애송시 ‘어느 사랑의 이야기’의 일부다.
모든 아름다운 것과 모든 어두움을 일깨워 준,
세상 그 어디에서도 다시는 있을 수 없는,
어느 사랑 이야기.
그 밝은 빛으로 나의 삶을 뒤흔들고,
이렇게 다시 그걸 거두어 가버리다니
아, 삶은 이토록 어둡기만 할까!
나 이제 살 수가 없어, 너의 사랑 없이.
이 같은 스페인 플라멩코의 노래 속에, 그 춤꾼 로레나의 매력적인 손놀림과 발놀림에 폭 빠진 여행자는 죽는 그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우물보다, 그리고 바다보다 더 깊은 플라멩코”와 로레나를 끝내 잊지 못하리라. 한마디로, 열정의 플리멩코와 우리나라 남도의 신명나는 설장고와의 만남의 과정을 그린 러브스토리다. 유럽 서남단의 이베리아반도, 스페인의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집시의 한(恨), 그 떨리는 소리, 아이! 아이! 깊은 노래가 우리 판소리와 너무 닮아서일까.
플라멩코를 추는 여성 댄서와 한국인 남성 여행객이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명적으로 만나 서로 상대의 문화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소설에는 주인공인 한국 남성이 플라멩코의 마력에 사로잡혀 스페인 그라나다와 세비야 등을 여행하면서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번역한 곡에 맞춰 댄서가 플라멩코를 추는 장면도 나온다. 그리고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플라멩코로 춰달라는 부탁까지 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 생각 좀 해보자.
집시의 한(恨)을 관능적인 춤으로 발산하는 것이 플라멩코라면 아프리카 대륙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의 아픔을 노래한 넋두리가 흑인영가일 테고 같은 나라 백성이면서도 반상적서(班常嫡庶) 계급으로 나뉘어 종노릇 해온 민초들의 슬픔을 승화시킨 것이 판소리가 아니었던가. 어디 그뿐 일까. 몇 년 전 스페인의 사회주의 정부 때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에선 한바탕 미디어 소동이 났었다. 공립학교 성교육 교과과정에 13세 이상의 소년 소녀들을 위한 자위행위 워크숍을 도입했기 때문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즐거운 쾌감은 네 손 안에 있다’라고 불렸다. 항의가 빗발치자 이 지방 당국은 미성년 아동들의 임신과 더 큰 불행을 예방하기 위한 성교육의 일환으로 ‘자위행위 수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안달루시아 지방정부도 같은 프로그램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친대중당(Popular Party) 단체에서 법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폐기시키려고 했으나 이 지방검찰청에서 항의를 접수조차 해주지 않아 실패했다. 흥미롭게도 이 법적 도전은 ‘깨끗한 손’이라고 명명되었었다. 이에 대해 페루의 2010년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미국의 지성 월간지 하퍼스 매거진에 실린 ‘성애예술’이란 에세이에서 아래와 같이 술회하고 있다.
“옛날 가톨릭 학교에 다닐 때 성기를 잘못 만지면 눈멀고 폐병 걸리며 미치게 된다는 신부님들 말씀에 잔뜩 겁먹었었던 내 어린 시절로부터 60여 년이 지나 학교에서 용두질 수업 시간이 생기다니 이것이 진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좋은 의도와 원치 않는 임신 사례를 줄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섹스에 관한 미신과 거짓말 그리고 잘못된 편견으로부터 어린애들을 해방시켜 주는 대신 이런 마스터베이션 워크숍은 그러지 않아도 성행위가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되는 현대사회에서 그 더욱 하찮은 짓으로 치부하게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키워준 쾌락의 원천을 미래세대로부터 박탈해 성행위를 아무런 신비감도 정열도 없이 단순한 신체적 운동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말이다”
자, 이쯤 해서 우리 국경과 이념, 종교와 신앙, 인종과 성 정체성 등 모든 인위적인 경계를 허물고 전 인간가족을 아우르는 플라멩코 여정에 올라 보리라. 아시안 최초로 ‘나 홀로’ 마라톤으로 2015년 2월 1일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해변을 출발, 114일만인 5월 25일 미(美)대륙횡단 3,150마일(약 5040km) 거리를 완주, 워싱톤 DC 백악관 앞에 도착한 강명구(당시 57세) 씨는 그동안 뉴욕 중앙일보에 연재해온 칼럼 ‘삶의 뜨락에서: 대륙횡단 마라톤 일기’의 ‘백악관에서 통일을 생각함’이란 글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었다.
“통일의 경비는 대륙횡단 마라톤을 하는데 지불한 경비보다 더 엄청난 경비가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휴전선이 무대의 막이 걷히듯 열리는 순간 우리의 새로운 역사의 무대가 펼쳐질 것이다. 한반도는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이라는 공연이 펼쳐지는 커다란 극장이 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복(福)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조각보를 만들었다. 통일은 비슷한 사람끼리 뭉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공들여 마르고 꿰매어 무지갯빛 조각보를 만드는 것이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