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시내와 돌산도를 잇는 돌산대교를 지나서 새벽녘에 돌산읍에 도착한 후 금오도로 가는 페리를 타기 위해 근처 신기항으로 이동한다. 산행버스를 탄 채 7시경에 출발하는 첫 배에 올라 20분 걸려 도착한 금오도 여천 포구는 도서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담한 포구다.
금오도(金鰲島)는 지형이 자라를 닮아 한자 그대로 큰 자라라는 뜻이다. 금오도는 원래 거무섬으로 불렸다. 조선 시대 궁궐을 짓거나 보수할 때, 임금의 관(棺)을 짜는 재료인 소나무를 기르고 가꾸던 봉산(封山)이었을 만큼 원시림이 잘 보존된 곳으로, 숲이 우거져 검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금오도 비렁길은 남해안에서 찾아보기 힘든 금오도 해안단구의 벼랑을 따라 조성되었기 때문에 벼랑길의 여수 사투리인 ‘비렁길’을 그대로 사용했다. 비렁길은 섬의 남쪽인 함구미에서 오른쪽 장지까지 연결되어 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작은 오솔길은 폭을 넓히고, 경사가 급하거나 바위가 많은 난코스는 나무다리와 계단으로 조성하여 한결 걷기가 편하도록 꾸며 놓았다. 자연을 가급적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총 5구간(18.5km)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오늘 우리 일행은 배 시간을 맞추기 위해 1구간부터 4구간까지만 걷게 된다.
비렁길 시작점인 함구미 마을에 들어서면 방풍 밭부터 눈에 들어온다. 이 섬의 방풍은 풍을 막아주며 임산부의 산후풍도 예방해 주는데, 맛 또한 일품이다. 해안가 암벽지대에서 자생하던 방풍을 언제부터인가 씨를 받아 재배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이 섬을 대표하는 특산물이 되었다.
마을을 벗어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흐렸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어서 나오는 송광사 절터는 방풍 밭으로 변한 지 오래다. 쉼터 옆 전망 좋은 곳에 서면 해무는 걷히고 가슴을 뒤흔드는 코발트빛 바다가 온몸을 푸르게 물들인다. 절터를 지나 오솔길 옆 산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섬 특유 장묘문화인 초분을 볼 수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바로 매장하지 않고 나무판자나 돌무지 위에 관을 얹고 초가 형태로 이엉과 용마루를 덮는다. 2, 3년이 지나 살이 썩고 뼈만 남으면 그걸 간추려 다시 매장을 하였다 한다. 초분을 지나면 바닷가 비렁길 위에 전망 좋은 신선대가 기다리고 있다. 바위 위로 부서지는 이승의 햇살이 너무 아름다워 잠시 걷기가 싫어진다.
이승은 참 좋다. 동백숲 길가에 자리 잡은 샘터에서 약수 한 모금으로 현란했던 동백꽃의 잔영을 눈에서 잠시 지우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오솔길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손에 잡힐 듯 아담하고 차분한 분위기에 젖은 두포마을이 다가온다. 두포마을은 1구간 종점이자 2구간 시작점이다. 이곳을 지나노라면 시간이 멈추어 있는 느낌이 든다.
2구간의 굴등전망대로 내려서는 나무데크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한다. 그냥 지나가면 후회하니 다리품을 팔아서 반드시 다녀오는 것이 좋다. 굴등 전망대에서 바라본 뽀쪽한 봉우리가 3구간의 매봉이다. 파도도 잠든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늑하게 느껴진다. 산 중턱 민가의 지붕에는 거친 해풍에 견디기 위해 굵은 로프가 감겨있고, 집 옆에는 유채꽃이 만발해 있다.
이렇듯 자연은 인간에게 시련과 환희를 골고루 나누어 준다. 1구간을 대표하는 오솔길이 동백숲 터널이라면 2구간은 단연 대나무 터널이다. 숲길에는 대나무들이 푸른 키를 자랑하며 하늘을 찌르고 있다. 직포마을은 2구간의 종점이자 3구간의 시작점이다. 500년은 족히 됐을 법한 소나무가 방풍림으로 마을 중앙을 지키고 있다. 수백 년 동안 마을과 민초들을 위해 모진 해풍을 버텨내고 묵묵히 서있는 그 모습이 대견스럽고 고맙게 느껴진다.
직포마을에서 출발한 비렁길은 3구간의 망산으로 치고 올라간다. 제법 경사가 있는 비렁길을 올라가자마자 동백나무가 좌우로 엄청난 군락을 이루고 있고 중간중간에 유자나무가 노란 열매를 맺어 유혹하기도 한다. 갈바람통 전망대에 서면 유달리 바람이 드세다. 전망대에 붙어있는 절벽 사이로 세찬 바람이 계속 솟아나고 있는데도 주위의 동백나무들은 꿋꿋이 자라고 있다. 금오도 비렁길 중 가장 경관이 수려한 코스는 3구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르내림이 다른 구간보다 심하기는 하지만 땀을 흘린 만큼 우리 눈을 즐겁게 해준다. 매봉 정상 바로 아래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있는 매봉 전망대는 비렁길 중 최고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뷰포인트다. 360도 조망이 가능하고, 쪽빛바다와 요철 형상의 해안절벽, 바다를 오가는 배 등 봄 바다의 낭만을 최대로 만끽할 수 있다. 아기자기하게 나무데크로 꾸며 놓은 해변길에서 하늘을 보면서 바다와 이야기하고 길옆 바위에 앙증맞게 붙어있는 콩란들과 눈맞춤하면서 걸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3구간의 종점이자 4구간의 시작점은 학동마을이다. 금오도 비렁길의 하이라이트인 3구간을 찾는 사람들로 가장 붐비는 어촌마을이다. 4구간 초입의 등로에는 동백 이파리들을 헤치고 강렬한 초여름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산허리를 돌아서 바닷가로 나오면 사다리통 전망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산모퉁이 너머로 비렁길 마지막 코스인 5구간의 막개가 바다 끝에 얹혀있다. 그 너머가 종착점인 장지마을이다. 4구간의 종점이자 5구간 시작점인 심포마을로 내려서면서 이제 비렁길 트레킹도 막바지에 들어선 셈이다. 빨갛게 이글거리던 태양도 바닷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며 민낯을 감춘다.
오늘 금오도 비렁길을 걸으며 느닷없이 고독을 느낀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댓잎 향이 코끝을 맴돌 때 울컥 치며 올라온 서걱대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새벽부터 저녁까지 금오도에서 머물다가 어둠을 뒤로하고 섬을 떠나니 그 외로움은 더욱 깊어만 간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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