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살아있음의 흔적'이다. 2년 전 친구들과 다녀온 몽골 초원트레킹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이번에는 사막과 초원을 달리며 러시아 국경 근처에 있는 홉스골로 가면서 민낯의 몽골을 만끽하려고 16명의 노마드가 울란바트로 징기스칸 공항에 도착한다. 공항에서 몽골 초원지대의 끄트머리에 있는 엘승 타사르하이(Elsen Tasarkhai)까지 5시간을 달리는 동안 파란 하늘과 맑은 햇살이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 우리 일행을 맞이한다. 유목민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는 평원,가축의 젖이 풍성해지는 몽골의 여름은 진정한 축복의 계절이다.
울란바토르에서 280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작은 사막 엘승 타사르하이, 몽골 초원지대의 끄트머리에 있어서 이곳을 ′초원의 사막′이라고도 부른다. 대평원의 초원에는 수를 셀 수 없는 양과 말, 소, 염소들이 우리를 반겨준다. 우리가 묵는 게르 캠프촌은 대평원의 초원과 사막 사이에 있는데 여행객들은 이곳에 머물면서 며칠씩 낙타 투어와 모래 샌딩을 즐긴다. 저녁 늦게 캠프에 도착하여 초원의 식탁에서 들판을 붉게 물들이는 황혼을 바라보며 첫날부터 양고기와 보드카를 즐긴다.
′작은 고비′라고도 불리지만 엘승타사르하이는 폭이 4㎞이고 길이가 100㎞에 이른다. 고비사막과 달리 비교적 아기자기한 모래언덕으로 뒤덮여 있고 초원도 있는 색다른 풍광의 지역으로 실개천이 흐르는 곳도 있어 유목민도 살고 있다. 우리 일행은 아침 일찍부터 낙타를 타고 모래 언덕을 오르는 투어를 하며 사막의 동물 낙타와의 첫 만남을 시작한다. 낙타 타기는 승마와는 또 다르다. 승마가 달리기라면 낙타 타기는 산책이다. 앉아 있는 낙타 등에 올라타니 낙타가 벌떡 일어서는데 이때 높이가 생각보다 높아 놀란다. 바람이 만들어 낸 모래 물결을 따라 작은 사구를 오르고 내려오는 재미가 생각보다 쏠쏠하다.
낙타 트레킹에 이어 모래샌딩을 하면서 양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부드럽고 편안한 모래알의 감촉이 너무 좋아 시간이 허용된다면 몇 시간 동안 맨발로 사막을 걷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 모래들은 항가이산맥에서 불어온 북동풍에 의해 여기까지 날아와서 쌓였다고 한다. 모래언덕에서 바라보는 파란 하늘과 맑은 햇살이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사막. 이곳은 모래 위 바람 같은 삶, 유목민 노마드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는 땅이다.
엘승타사르하이에서 13세기 몽골수도 카라코룸을 향해 출발한다. 가는 내내 돌산과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이 반복되는데 자주 나타나는 흰 점들은 게르고 검은 점들은 양떼다. 형형색색의 띠가 바람에 펄럭이는 몽골 서낭당 어워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12시경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을 지나자 몽골 고대도시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만리장성처럼 길게 이어진 담벽과 인공조림한 나무들이 보이고 긴 수로를 판 저수지도 보인다.
울란바토르에서 남서쪽으로 약 360㎞ 떨어진 지역, 길게 뻗은 물줄기가 있는 어르헝 계곡은 초원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보기만 해도 속이 탁 트일 만큼 광활한 이곳은 야생 그 자체다. 어르헝 계곡이 자리한 지역은 중세 몽골 제국의 두 번째 수도, ′카라코룸(Karakorum)′이있던 곳이다. 몽골초원의 중심인 오르콘강 유역의 기름진 초원은 오래전부터 스키타이 훈, 유연, 투르크, 위구르의 도읍지였으며, 유럽과 아시아, 인도, 중국에 이르는 대제국의 중심지였다. 칭기스칸의 후계자인 몽골의 2대 칸 오고타이(1229~1241)에 의해 수도로 정해졌으며, 13세기 쿠빌라이칸이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약 30년 동안 제국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유라시아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과 물자로 늘 붐비던 카라코룸은 19~20세기 러시아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시작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출토된 유물 가운데 상당수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부는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에 있고, 또 최근에 일본의 도움으로 문을 연 카라코룸 박물관에 중요 유물들을 상당수 전시하고 있지만 도시의 전반적인 실체를 가늠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30여 년간 번영을 누렸던 카라코룸이 저물기 시작한 시기는 쿠빌라이가 중국 전역을 차지하고 원나라를 건국하면서부터다. 그가 수도를 대도(大都, 현재 베이징)로 옮기면서 카라코룸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원나라가 존속할 때까지는 그나마 도시로서의 명맥을 보존했지만, 14세기 후반 원나라가 명나라에게 붕괴하면서 카라코룸도 서서히 폐허로 변하면서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16세기 말, 알탄 칸의 사망으로 몽골은 혼란에 빠지고, 위정자들은 티벳 불교의 힘을 빌려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티벳 불교 사캬파의 주도로 아브타이샌 왕이 수도 카라코룸의 궁전 위에 도시의 1/10 규모로 몽골 최초의 라마교 사원인 에르덴조 사원을 세웠는데, 가로, 세로 400m의 정사각형에 불교의 묵주를 상징하는 108개의 사리탑을 사원 외곽에 설치하였다. 그 이후로도 차례로 건물들이 건립되었으며, 1917년에는 경내에 62동의 사원과 500개의 건물이 있었고 1,000 명 이상의 승려가 거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명에 이어 청의 몽골 말살 정책 추진으로 인해 대부분의 몽골 역사와 문화가 철저히 파괴되었다. 근래에 들어와서도 몽골혁명 후 소련의 탄압을 받았으며, 몽골인 3만 명 이상이 숙청되었는데 이 중 1만7000명이 승려였다고 한다. 에르덴조 사원도 폐쇄되어 승려가 사라지고 사원이 파괴되었다. 1992년 민주화 이후 종교 활동이 재개되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이곳을 찾는 불교 신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제 카라코룸의 궁전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지만 그나마 에르덴조 사원을 통해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의 영화를 가늠해 볼 수 있어 한편으로 다행스럽다. '에르덴조'는 '100개의 보석'이라는 뜻인데 카라코룸의 돌로 사원을 지었으니 가히 보석이라 부를 만하다.
사원의 핵심을 이루는 3개의 전각 안에 모셔져 있는 석가모니불은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 주운 조에서는 출가 전인 14세 때의 모습, 중앙의 걸 조에는 깨달음을 얻은 35세의 모습, 바론 조에는 입적할 당시인 80세 때의 모습으로 각각 석가모니의 어린 시절, 청년 시절, 노년 시절을 표현하고 있다. 티벳 불교의 영향을 받은 사원 안의 벽화와 탱화도 인상 깊었으나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 라마'는 여기 몽골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 후반 북원(北元)의 알탄 칸은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수장이었던 소남갸초를 만나 깊은 감명을 받아 그에게 하사한 이름이 바로 '달라이 라마'다. 몽골어로 달라이는 '큰 바다', 라마는 '영적인 스승'이므로 '큰 바다 같은 스승'이라는 뜻이다. 이때부터 티벳 불교는 달라이 라마가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광활한 초원 한가운데 동서양을 아우르는 세계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 13~14세기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한 동서 문명교류의 장으로서, 유라시아 대륙에 몽골 주도의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진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의 발상지. 그러나 지금은 황량한 초원 위에 서 있는 에르덴조 사원과 만안궁 터에 버려져 있는 돌거북 귀부(龜趺)만이 예전의 영화로움을 말해줄 뿐이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