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진 칼럼] 예고 없는 이별

허정진

한여름 마른하늘에 제비들이 갑자기 땅바닥으로 낮게 날기 시작하면 곧이어 소낙비가 쏟아질 것을 예고한다. 빨래도 걷고 장독 뚜껑도 닫으며 비설거지를 해야 한다. 정원에 멀쩡하던 소나무가 청청하던 빛깔을 잃고 솔방울만 촘촘히 맺고 있으면 더 이상 생존이 힘들어 최후의 번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징후이다. 그 이유와 까닭을 서둘러 확인해야 한다. 

 

갑자기 건강이 나빠졌다거나, 갑자기 담장이 무너졌다면서 불가항력처럼 이야기들 하지만 알고 보면 사전에 낌새와 귀띔이 분명히 있었다. 평소보다 혈압이 높아지거나,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벽에 금이 가거나 하는 조짐 말이다. 그 경고를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갑자기 발생한 일로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예고 없는 결과는 세상에 없다.

 

아버지가 그랬다. 그 겨울엔 기침이 무척 심했다. 입을 열기만 하면 끊이지 않는 헛기침과 쇳가루 달라붙은 듯한 숨소리가 힘들어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겨울 감기려니 대수롭잖게 여기고 약을 지어 먹었지만, 효과가 신통치 않았다. 제대로 진찰이나 받아봐야겠다며 평소처럼 외출복 차림으로 병원에 들르신 게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마지막 나들이가 되고 말았다. 

 

폐섬유화병. 폐가 굳어서 더는 숨을 쉴 수가 없다는 진단 결과였다. 이러다간 앞으로 정상적인 호흡이 불가능하다는 주의적 경고가 아니라, 이 지경이 되도록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느냐는 선고형 질책이었다. 정신과 오장육부가 멀쩡한데 사람이 되어서 숨을 쉬지 말라니, 낮 도적을 만난 것처럼 순간 얼마나 기가 막히고 눈앞이 황망하셨을까. 한 달가량을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무상한 삶의 종말을 의심하고 여투다가 그 길로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평소에도 기침이 잦고 목소리가 노쇠했었다. 언덕길을 조금만 올라도 숨이 새근발딱거리고 눈물 같은 땀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등산은커녕 동네 공원 발걸음도 쉽게 피곤해짐을 이유로 별반 내키지 않아 하셨다. 몇 해 전부터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연로한 나이 탓으로, 쇠약해진 기력 탓으로만 애써 외면하고 말았다. 우둔하고 주의력 없는 자식들은 아버지가 갑자기 아프고,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주위에 변명하기 바빴다.

 

바보 아버지라고 항변했다. 아픈 시늉이나 엄살도 부릴 줄 모르고, 아파도 식구들 걱정이 염려스러워 겉으로 내색 한번 할 줄 모른다고 뒤늦게 호들갑이었다. 불치의 병이라 할지라도 남들처럼 몇 년간의 시한을 주었더라면 못다 한 호강이나 맛난 음식점, 경치 좋은 곳에 구경도 하면서 서둘러 효도하지 않았겠냐고 되레 신경질들 부렸다. 치매나 오랜 병고로 자식들 고생도 시키면서 효심의 정도와 진위도 시험해 보았어야 마땅하지 않았냐고 다투어 엉너리 치는 소리나 나달댔다. 미처 하지 못한 효도에 대한 풍수지탄이고, 일종의 죄의식이었다.

 

노후를 산수 좋은 시골에서 지내기를 권했지만 힘닿는 데까지 일하면서 살겠다고 무소뿔처럼 고집을 피우시더니 결국 망자의 몸이 되어 고향 산천으로 귀향하셨다. 별다른 취미나 놀이에도 관심이 없어서 세상 아버지들처럼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근면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자식이 뭔지, 젊어서는 조금이라도 잘해주려 애면글면하고 늙어서는 조금이라도 짐이 되지 않으려 노심초사했다. 

 

맘 편히 휴가를 즐긴 적도 없어서, 주위의 독려와 응원이 있고서야 처음으로 어릴 적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한 봄날의 약속, 그 정겨운 추억의 진달래가 채 피기도 전에 혼자서 하늘 여행을 떠났다. 그저 바쁘고 강하게 사는 것만이 옳고 잘하는 일인 줄만 알았던 이승의 시간, 병상에 누워 스스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서야 세상 앞에 무기력하고 허탈한 표정이 얼마나 또 아버지의 그 가난한 삶을 안쓰럽게 만들었는지…….

 

어린 꼬마가 하늘에 연을 띄웠다. 해동의 얼음장을 깨고 봄바람 싱그러운 날, 창호지와 밥풀과 대나무 살을 앞마당에 펼쳐놓고 아버지가 솜씨 좋게 연을 만들어주셨다. 연 꼬리를 길게 두 개씩이나 달고서도 좀처럼 하늘 자리를 잡지 못하고 불안하게 요동을 칠 때마다 아버지가 곁에서 연줄을 대신 붙들어 세상 한가운데 안전하게 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소맷자락을 걷어 올린 아버지의 팔뚝은 검붉은 핏줄이 불끈거리는, 영화 속의 삼손처럼 어린 눈에 웅대한 모습 그대로였다. 느티나무 같은 믿음, 태산 같은 존재감은 그 탄탄한 팔뚝에서 나오는 힘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 무쇠 같은 삶의 연줄을 이제 허공 속에 힘없이 놓아버린 것이다. 여기저기 수많은 주삿바늘 자국으로 시퍼렇게 멍든 아버지의 팔뚝은 그렇게 삭정이마냥 야위어져 힘겨운 호흡 소리에도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생명은 예측의 대상이 아닌 모양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난다고, 평소에 건강하다고 해서 모두가 장수를 보장받은 것은 아니다. 황당무계한 사고나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천재지변은 또 얼마나 많은가. 멀쩡한 하늘에 소낙비 오듯, 청청하던 나무가 하루아침에 푸른빛을 잃듯 세상의 일들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예고 없이 다가올지 아무도 모른다.

 

‘세월은 나를 기다리거나, 나 때문에 멈추지 않는다(歲月不待人, 歲月不我延).’라고 한다. 효도에 때와 장소가 따로 있을 수 없다. 효도하는 자식은 거리가 가깝게 산다고, 시간이나 재산에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닐 것이다. 마음이 가까워져야겠다. 훗날 내가 출세하고 성공해서 호의호식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먼저 부자가 되어 평소에 손과 발과 가슴으로 하는 효도가 최선이고 최적이 아닐까 한다.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서 자랑스러웠다고, 임종을 앞두고서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건넨 그 불효가 참으로 후회스럽다. 예고 없는 이별은 평생을 두고 가슴에 담아야 할 아픈 상처를 남겼다. 

 

 

[허정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4.07.16 09:53 수정 2024.07.16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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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