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반도는 예년보다 강수량이 많은 가운데 장마가 한창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장마가 끝나자마자 본격적으로 찜통더위가 시작되는데, 올해는 예년보다 무더위가 한층 기승을 부릴 전망이라고 한다. 찜통의 도시를 벗어나고 싶은데 바빠서 시간은 없고 어딘가 가야겠다면 수도권에 있는 시원한 계곡을 추천한다. 짙은 초록빛 숲에서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그늘진 편안한 등산로를 따라 트레킹을 하거나 차가운 계곡물에 발 담그면 더위와 함께 스트레스까지 후련히 벗어던질 수 있다.
가평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자연 생태계의 보고다. 수도권과 가까운 가평은 경기도 동북 산간지역에 위치하여 대부분이 험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가평의 산줄기는 북쪽으로 화악산이 진산(鎭山)이 되어 촛대봉, 매봉, 국망봉, 강씨봉, 명지산, 수덕산, 계관산을 거느리며, 해발 700∼800m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한북정맥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가평에는 한북정맥이 부려놓은 수려한 계곡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명지계곡이 으뜸이다.
명지계곡은 경기도에서 화악산(1,468m) 다음으로 높은 명지산(1,267m)의 정상에서 동쪽으로 길게 흐르는 계곡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계곡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고 물이 맑아 경기도의 상수원이자 청정지역으로 관리되고 있다.
명지계곡으로 가는 들머리는 75번 도로 옆에 있는 가평 명지산군립공원 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왼쪽 계곡 길로 들어서자마자 명지산 산행 들머리가 나온다. 잦은 소나기로 계곡에는 맑은 물이 철철 넘쳐 흐르는데 이 물은 75번 도로 옆을 흐르는 맑디맑은 명지천으로 흘러 들어가고, 연인산 용추계곡 물과 만나 가평천을 이루며 북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명지산군립공원 관리사무소를 지나자 옛날 시골 정취를 듬뿍 느끼게 하는 물레방아와 방앗간이 시선을 끈다. 산길에 물소리 들리지 않으면 제맛이 안 난다. 크거나 작은 돌들이 포개지고 뒤엉킨 계곡으로 물살이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흘러내린다. 저 무성한 잎새들의 꼭대기 위로는 땡볕이 이글거린다. 하지만 푸른 그늘이 내린 산길은 차라리 서늘하다.
이 길은 옛날 산판 길로 이용되었던 길이라 지금도 잘 닦여 있다. 계곡을 따라 좌우로 들어찬 수림을 둘러보며 평지에 가까운 이 길을 1km 정도 걸으면 키가 엄청 큰 승천사의 미륵보살께서 사천왕문 위에서 미소를 띠며 반겨준다. 세월이 제법 흘렀는지 전에 뵈었던 보살님의 빨간 연지가 그동안 조금 옅어졌다. 승천사는 명지산이 품은 정갈하고 소박한 사찰로 비구니 도량이다. 미륵보살께 삼배 올리고 절을 나서는데 열린 법당문 사이로 스님의 염불 소리가 흘러나와 먹물이 습자지에 배어들 듯 명지계곡에 잔잔하게 깔린다. 승천사 종각 뒤로 보이는 명지산은 어서 오라 손짓하건만 오늘은 명지폭포까지만 걷는다.
승천사를 지나면 비포장의 숲길로 들어선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원시림에 덮인 산판길을 따라 오르면 제법 넓은 개활지가 나온다. 과거 화전민들이 살았던 집터다. 예전에 명지산과 인근 연인산에는 화전민들이 많았는데, 가평의 산간오지에 뿌리를 내리고 산판 작업과 약초 캐기로 생계를 유지해 온 그들의 고단했던 삶을 생각하니 한편으로 가슴이 저며온다.
약 30분 정도 오르면 명지계곡을 가로질러 건널 수 있는 2개의 교량이 나온다. 2년 전까지는 급경사의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가야 했는데, 최근에 하늘다리와 구름다리가 설치되고 폭포까지 테크로드가 연결되는 바람에 안전성과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명지계곡의 중간쯤에 있는 명지폭포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정도로 깊은 계곡 속에 자리하고 있다. 높이는 약 10m이지만 위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떨어지며 내는 굉음은 깊은 원시림의 적막을 깨우고 있다. 큰 바위를 비벼대며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에 겁을 먹은 여름은 달아나고 없다. 떨어진 물은 바위들이 둥글게 두른 곳으로 모여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심연처럼 깊은 용소(龍沼)를 이루고, 바위 위로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이 햇빛을 가려 소의 물은 더욱 검푸르게 보인다. 여름에는 불볕더위를 잊게 하는 피서지이며, 가을에는 붉게 물든 단풍과 어우러진 빼어난 경관을 지닌 곳으로 명지계곡을 대표하는 명소다.
시리고 시린 폭포수에 발을 담그고 가평 잣막걸이로 목을 축인다. 골바람이 달려와 물가에 선 잣나무를 흔들고, 나뭇잎들 사이로 햇살이 들이쳐 용소 위로 떨어진다. 세월에서 묵은 때, 저자에서 얻은 먼지를 털어내며 계곡과 폭포의 운치를 실컷 즐긴다.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아니던가.
◆ 명지계곡 들머리인 명지산군립공원으로 가는 교통편은 전철로 경춘선 가평역까지 간 후 가평에서 15-5번 버스(1일 3회)를 이용하거나, 자가용은 네비에 ′명지산군립공원 주차장′(주차비 무료)을 치면 된다.
가평 경반계곡에 들면 잠시 선인(仙人)이 된다
가평의 경반계곡은 당일 피서지로 최고다. 거울 경(鏡), 큰 돌 반(盤), ‘거울처럼 맑은 반석’이니 신선이 노닐 듯이 수려한 풍광을 지닌 곳이다. 경반계곡은 회목고개 아래 수락폭포에서 시작되어 가평천에 합류되는 5km의 오지 계곡인데, 울창한 삼림과 차갑고 맑은 물을 지닌 청정 자연이 그대로 남아있는 골짜기다. 이웃한 용추계곡에 비하여 경관은 손색이 없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다.
연인산 자락의 칼봉과 매봉 사이에 있는 경반계곡은 주로 칼봉산휴양림의 백학동에서 출발하여 경반분교 터와 경반사를 거쳐 수락폭포까지 오른 뒤 다시 경반사 아래로 내려와 잣나무 군락지 사이로 난 임도를 따라 칼봉산휴양림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11km, 4시간)를 적극 추천한다.
칼봉산 자연휴양림은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환경친화적 휴식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가평읍에서 휴양림까지는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지만 여기서부터 경반분교와 경반사까지 길은 임도처럼 널찍하지만 4륜구동 차량만 들어갈 수 있는 험한 길이다. 비가 온 뒤에는 길이 끊기기도 하고 수시로 물길을 건너야 한다.
가평읍 경반리 칼봉과 매봉 사이 수락폭포에서 시작되는 경반계곡은 폭은 좁지만 인근에 있는 용추계곡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칼봉산은 한북정맥의 명지산 남쪽 능선에 솟은 매봉의 동쪽 봉우리 중 가장 높은 산이다. 주 능선이 칼날처럼 날카로워 칼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곡 입구에 있는 용추폭포와 골짜기 안의 수락폭포로 유명하다.
산행 들머리인 한석봉마을은 명필가인 한석봉이 가평군수로 있을 때 이곳을 자주 찾아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계곡을 따라 그냥 편하게 숲길을 걷는다. 그러나 길만 보고 걷다가는 길섶의 달맞이꽃도, 오디나무도, 산길 아래 어둑한 숲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도, 화전민들이 살았던 사람살이 흔적들도 그냥 지나치게 된다. 길가의 뜰보리수나무 열매는 맛이 상큼하고 입안이 시원하여 지금이 먹기에 딱 좋다. 한 움큼 따서 호주머니에 넣으면 수락폭포에 오를 때까지 간식으로 요긴하게 먹을 수 있다. 숲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갈수록 계곡물이 자주 산길을 넘쳐 흐른다. 수량이 적은 날에는 징검다리로 건너지만 비가 온 뒤에는 등산화를 벗어야 한다.
경반분교는 1980년도까지 화전민 자녀들이 다니던 학교였다. 산에 사는 사람들이 점차 떠나면서 학교도 자연히 폐교가 되었는데 지금은 야영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반분교는 MBC 1박 2일 팀이 ‘오지 캠핑 체험’을 여기에서 촬영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졌다. 이곳은 ‘오지캠프’를 즐기는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된 지 이미 오래인데, 네이버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한 후 예약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경반분교를 지나면 마지막 민가가 나온다. 나무껍질로 만든 너와집이 산과 많이 닮아있다. 식당을 겸하고 있는데 고목에 길게 매달린 그네가 정감을 더한다. 선인들은 산을 경전(經典)으로 삼고 살았다. 삶은 통째 산을 닮으려는 노력이었다. 이런 산골에서 귀를 열고 자연의 소리나 들으며 욕심 없이 사는 것이 바로 선(禪)이 아닐까.
경반계곡은 곳곳에 소(沼)를 만들어 낸 매우 여성적인 계곡이라 할 수 있다. 계곡 주변으로 나무들이 울창하여 마치 계곡이 나무속에 들어가 있는 듯하다. 잠시 후 임도와 회목고개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회목고개 방향으로 30여 분 오르면 비포장된 도로가 끝나는 곳에 아담한 폭포 옆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암자 경반사에 이른다. 경반사 아래는 작은 폭포가 있고 아담한 소의 연초록빛 수면에 나무 그림자만 일렁거린다. 모든 것이 소박하다. 입구에 있는 작은 종, 허름한 민가 건물에 불상을 모신 작은 암자라서 더욱 정겹다. 절 입구에 있는 작은 종을 울리면 잠든 영혼을 깨우고 지친 마음에 쉼표를 그려주는 동네 여염집 같은 절이다. 주변에 서 있는 초목들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향기가 절집에 그윽하다. 오지의 짙은 녹음 속에 자리한 경반사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법당이다.
경반사를 나와 회목고개로 오르는 임도에서 ′수락폭포′ 안내판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물길로 내려서면 웅장한 맛은 없으나 빽빽이 우거진 숲 사이로 옥빛 소(沼)와 크고 작은 폭포들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바위골짜기가 나온다. 폭포는 높이 33m 되는 바위 절벽을 물살이 비스듬히 퍼지며 타고 흘러내리는 형국인데, 천고의 바위틈에서 자란 기송노수(奇松老樹)가 폭포의 절경을 더하고, 폭포가 내는 우렁찬 물소리와 함께 자욱한 물안개가 계곡에 가득하다. 폭포 위에 있는 선녀탕에는 늘 은은한 옥빛 물이 고여 있는데, 선녀 한 사람이 몸을 담글 만한 아담한 크기다.
수락폭포 앞에서 탁족을 즐긴 뒤 발길을 돌려 내려간다. 빽빽이 들어선 잣나무 숲 사이로 난 임도로 들어서자 산길은 적막하고 고즈넉하다. 울울창창(鬱鬱蒼蒼) 잣나무 숲이 불멸의 생, 바로 영생이 아닐까. 느릿느릿 걷는 것처럼 마음에 충만을 주는 행위도 드물다. 경사진 듯 평탄한 듯 쭉 곧은 듯 구부러진 듯 완만한 임도를 넉넉한 마음으로 천천히 걷다 보면 산이 나요, 내가 바로 산이다.
숲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물소리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 뿐이다. 속세에서 소음으로만 들리던 매미소리가 이곳에서는 마음을 일깨워 머릿속을 비워 주는 자연의 가르침으로 들린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자연은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드니 짚라인을 타는 젊은이들이 머리 위에서 숲을 가로지르며 내는 괴성이다. 경반계곡의 원시림 하늘 위에서 액티비티를 한참 즐기는 중이다.
칼봉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해서 잠시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당실당실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물 흐르는 소리인지 솔바람 소리인지 구분이 안가는 계곡의 숨소리에 귀 기울여본다. 산과 하늘의 밝음과 물과 소리의 맑음을 마음에 담으니 잠시나마 선인(仙人)이 된다.
◆ 경반계곡 들머리인 칼봉산자연휴양림 입구로 가는 교통편은 전철로 경춘선 가평역까지 간 후 가평역에서 15-5번 버스(1일 3회)를 이용하거나, 자가용은 네비에 ‘칼봉산자연휴양림’을 치면 된다.
가평 연가(戀歌) 흐르는 용추구곡(龍湫九谷)
여름에는 숲이 우거진 골짜기를 걷는 것이 좋다. 칼봉산(900m)에서 발원하여 옥녀봉을 감싸듯이 흐르는 가평 용추계곡은 총 24㎞에 걸쳐 흐르는데, 옥색의 맑은 물과 계곡마다 병풍처럼 펼쳐지는 기암괴석, 능선에 우거진 참나무, 잣나무 군락지 등 훼손되지 않은 청정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수도권의 대표적인 계곡이다. 계곡을 따라 걷거나 계곡 속을 걷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기도 하다. 여름에는 가족 단위로 많이 찾는데 계곡이 넓고 반석과 얕은 소가 많아 물놀이를 즐기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가평군의 옛 이름은 ‘가릉군’이다. 유학자인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 선생은 ‘가릉군 옥계산수기(嘉陵郡玉溪山水記)’에서 이 계곡의 비경을 감탄하며 ‘용이 하늘로 오르며 아홉 굽이에 걸쳐 그림 같은 경치를 수놓았다’는 의미로 옥계9곡(玉溪仇谷) 또는 용추구곡(龍墜九谷)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용추계곡 트레킹은 연인산도립공원 안내소를 출발하면서 시작된다. 1곡 와룡추를 시작으로 9곡 농원계까지 용추계곡의 아홉 굽이를 돌면서 약 6km 코스의 탐방로를 따라 2시간 정도 걷게 된다. 맑은 물과 기암괴석, 짙푸른 녹음이 어우러진 풍광도 즐기고, 원시의 계곡물에 몸을 담그며 잠시 자연인이 되어보기로 한다.
트레킹이 시작되는 연인산도립공원 안내소 상류 쪽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용추폭포는 풍파에 힘겨워 너럭바위 위에 패어 내린 물길로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물이 흘러내리며 그 아래로 아름다운 담(潭)을 이루고 있다. 기암 사이로 물줄기가 시원하게 떨어져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린다. 1곡 ‘와룡추(卧龍湫)’는 용이 승천했다는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진다. 폭포 옆 경사진 바위 위에 깊게 파인 자국은 용이 누웠던 자리라고 한다.
이 일대가 연인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계곡 중간까지 포장도로가 이어지며 차량 통행이 늘었고, 곳곳에 펜션과 음식점이 들어서면서 과거의 오지계곡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래도 차량 통행이 금지된 상류 지역은 여전히 원시림이 살아 있어 한편으로 다행스럽다.
간이 주차장 바로 위 계곡에 있는 ‘무송암(撫松巖)’은 천년 묵은 노송이 바위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다. 정면에서 보면 사람 모습이지만 남쪽과 북쪽에서 보면 남근석과 흡사해서 자식을 원하는 여자들이 많이 찾았던 바위라고 한다. 그래서 미륵바위라고도 부른다.
오랜 세월 동안 물과 바람을 견디어온 바위는 아름다운 형상의 크고 작은 소를 만들고, 바위 사이를 흐르는 물은 부딪치고 깨지고 흩어지고 다시 모이면서 다양한 소리를 내는데, 이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최고의 화음이다. 그래서 3곡 ‘탁영뢰(濯纓瀨)’는 구슬같이 부서지는 계곡 양안에 있는 바위라서, 4곡 ‘고슬탄(鼓瑟灘)’은 흐르는 물소리가 거문고와 비파 연주소리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비탈 큰 바위에는 토종꿀 채집통이 매달려 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비경에 취해 결코 가깝지 않은 이 길을 피곤한 줄 모르게 걷는다. 맑다 못해 시리게 푸른 계곡물은 남은 빛깔마저 남김없이 받아들인다. 5곡 ‘일사대(一絲臺)는 좁은 협곡 안에 하얀 실타래를 늘여놓은 듯하고 물빛이 속까지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찾기 어려운 곳에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쉽다. 계곡의 마지막 공영주차장 공원 옆의 깊은 협곡에 있는데,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시퍼런 물길에 두려움이 앞선다.
달 밝은 가을 밤 바위 아래 동그란 연못인 6곡 ‘추월담(秋月潭)’과 푸른 숲이 우거진 협곡인 7곡 ‘청풍협(靑楓峽)’을 지난다. 산자락에는 원시림과 함께 잣나무, 참나무 군락이, 길가는 얼레지, 은방울, 투구꽃 등 야생화들이 쉬엄쉬엄 걷는 이들의 시선을 뺏어간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번뇌로 가득한 삶의 무게가 어느새 가벼워졌음을 깨닫는다.
칼봉산 쉼터가 있던 곳을 지나면 용추계곡의 상류가 시작되는데 여기부터 본격적으로 숲길이 시작된다. 한 점 새소리마저 흡입한 탓인가. 깊은 숲길은 아득하다. 잘 다져진 흙길을 따라 마음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이라 한여름에도 햇살이 잘 들지 않아 시원한 녹음 트레킹을 즐긴다. 차분한 산길은 몇 차례 징검다리를 건너 마지막 9곡으로 이어진다.
‘용추(龍湫)’라는 이름은 계곡의 아름다움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적인 단어다. 용이 머물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할 만큼 웅장한 폭포와 깊은 연못을 품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깊고 물이 많은 골짜기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제8곡 귀유연은 옛날 옥황상제를 모시던 거북이가 용추계곡의 경치에 반해 내려와 놀다가 결국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그대로 바위로 굳어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 오는 곳이다. 거북이 모양의 바위 옆에서 하얀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와 깊은 소를 바라보며 짜릿함을 즐긴다.
빛 한줄기 숨어들지 못하게 빼곡한 숲길 안은 흐르는 물소리와 서늘한 바람, 잣나무가 뿜어내는 향으로 가득하다.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산자락 곳곳에 낮은 석축과 계단 모양의 지형이 눈에 띈다. 이곳이 과거 화전민들의 애환이 서린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려준다. 참나무 숯을 만들어 내다팔던 숯 가마터도 보인다. 그들은 떠났지만 그들이 땀과 노동으로 일구었던 치열한 삶의 흔적은 아직도 깊은 오지 곳곳에 남아있다.
제법 너른 숲길이 끝나는 깊은 계곡에는 물살이 흐르면서 노니는 시내, 9곡 농원계가 있다. 연인산에서 흘러내린 옥수가 모여 골짜기를 이룬 이곳은 기묘한 바위와 티끌 하나 없는 맑은 물, 울창한 숲이 서로 손잡고 태고의 자연을 빚어낸다. 물속에 들어가니 물속에 내가 투영된다. 농원계의 맑은 물은 그동안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아준다. 사람을 환장하게 하는 계곡이 많은 가평이 너무 좋다. 그래서 골짜기에는 가평 연가(戀歌)가 흐른다. 농원계의 징검다리를 지나가면 청풍능선을 따라 연인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계속 이어진다.
하산하는 오솔길을 따라 용추계곡 녹수(綠水)도 같이 따라 내려온다. 아래로 흐르는 물길을 따르니 육신조차 편안하다. 구름 걸친 산자락에 마음의 덧을 내 걸으니 마음 또한 편안하다. 한여름 고단한 속세의 삶에 지친 이들은 맑은 물에 마음을 헹구는 심정으로 용추구곡을 찾아볼 일이다.
◆ 용추계곡으로 가는 교통편은 전철로 경춘선 가평역까지 간 후, 가평역에서 71-4번 버스를 타고 용추 종점에 내리거나, 자가용은 네비에 ‘가평용추계곡 주차장’을 치면 된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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