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온 뒤 설악은 골짜기마다 물이 철철 넘쳐 신선 무도를 이루며 백담 계곡에서 만해의 강물로 흐르고 있었다. 맑은 물속에 잠긴 백석의 줄무늬가 공룡의 유골처럼 창연한데 영겁의 세월을 물속에서 순백의 만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물과 백암석이 이루어 낸 백담의 회화도이다.
추억의 산행이 생각난다. 8월 어느 날 설악산 종주를 백담 계곡에서 시작, 백담사, 수렴동 계곡을 타고 봉정암을 넘어 소청, 대청, 설악동으로 내리는 여정을 택했다. 목마름과 더위가 사막 같았다. 다행히 봉정암 가는 길엔 작은 폭포 담이 많아 등산복 차림으로 남녀가 수치심 없이 첨벙첨벙 뛰어든다.
그리고 다시 걷다가 뛰어들곤 하였다. 봉정암 길은 험하고 가팔라서 오르기 정말 힘든 길이었다. 봉정암은 가장 높은 산상에 있는 기도처로 심상 기도발이 잘 받는다고 12월이면 대입 수험생 부모들이 입체 여지없이 수행처로 택하는 곳이다. 땅바닥에 자릴 펼 곳이 없을 만큼 기원 자가 모였다.
그런데 오늘 산행은 산중 피서였다. 용대2리에서 백담사 가는 보행길은 70m 수직 벽 아래 계곡수를 바라보며 꾸불꾸불한 비포장도로를 아스라하게 7km를 2시간여 걷는다. 그런데 지금은 포장도로에 로변 테크 길이 잘 다듬어 놓여서 쉽고 경관이 한층 아름다웠다. 오를 땐 버스로 이동하고 내려올 땐 도보로 오는데 참 좋은 행로였다.
비 온 뒤 백담 계곡은 맑은 물로 가득하다. 산물이 백암을 깔고 백담을 이루며 흐른다. 이렇게 백담사 가는 길은 환상적인 백담의 아름다움을 회화도를 만끽할 수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탄회가 쏟아진다. 그런데 더욱 눈여겨보면 물속에 깔린 백암의 화풍이 장관이다. 만물의 형상이 물속에 드리워 있다.
순백색 암석에 만상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수암물상이다. 백룡이 승천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움쿠린 좌상은 경이롭다. 솟구치는 위엄과 아름다움을 분출하는 석화들이 오만 형상으로 흐르는 물굽이를 붙잡고 버틴다. 그 애탄 몸부림은 요녀의 아름다운 몸태 같았다. 수중 성화의 화판은 가히 명작이로다. 백담길에서 만물 회화를 느끼는 것은 현상과 이상을 초월한 예술가와 작가의 창작 혼일 것이다. 백담에 가면 물밑과 물 위에 그리고 경계에서 약동하는 생명이 꿈틀대는 형상이 아름다운 화풍으로 그려진다.
어떻게 순백암의 정취가 저렇게 예쁠까. 이번 백삼보행은 소설가 산악 팀과 여행자 클럽이 예감하는 진품이었다. ‘자연은 아름다움만큼 나를 순화한다’라는 소협가 산악팀의 슬로건과 ‘여행으로 세상을 보고 인간을 이해한다’ 란 여행자 클럽의 일치된 감동이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빛의 조화이며 형상이지만 어둠의 세상이나 물속의 형상까지 심상으로 헤아려 음미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상상력이다. 우린 형상을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발로 쓰는 작품과 눈으로 그리는 회화를 즐긴다.
백담 계곡을 2시간여 걸으면서 잃어버린 나를 찾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앞만 보고 걷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보이면서 너를 보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이 더 총명해지는 것을 알았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사람 됨을 인식하는 것은 나보다 너를 위한 사랑과 순수를 보상받고 헛된 야욕과 과욕을 버리는 감정의 다스림이었다. 때가 묻지 않은 순수가 최상의 삶이라는 것을 백담 수행에서 알았다.
백담은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맑게 해주는 심정제라고 할까. 누구나 백담에서 복잡한 자아를 떨쳐버리고 물속에 그려진 순백암의 회화를 바라보며 오염된 생각을 말끔히 정화하고 백담의 물처럼 맑고 깨끗한 삶을 추구하리라.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
이메일 :danmo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