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방, 외교, 정치, 종교, 사회 등 모든 인간의 문제는 대인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육군과 수군의 협력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얼마 전에 개봉된 임진왜란 관련 모 영화를 관람하였는데, 정유재란 발발 시기 권율과 이순신이 서로 반목하는 모습을 극장 화면으로 비추어 주었다. 본 칼럼이 영화에 대한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영화에 픽션이라는 요소도 없을 수는 없지만, 역사 영화를 표방하는 이상 고증이 올바로 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잘못된 고증은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된 선입견을 오랫동안 남기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쟁 시기의 대부분 동안 조선 육군은 원수 권율이 지휘하였고, 조선 수군은 통제사 이순신이 관할하였다. 당시 권율과 이순신의 관계가 일부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갈등은 육군과 수군의 징병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선조실록』의 해당 기록을 옮겨놓은 것이다.
『선조실록』 권46, 선조26년(1593년) 12월 1일 경술 12번째 기사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도원수 권율의 장계 내용을 보니, 도원수의 의견은 육전을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제사 이순신은 전일에 조정에서 연해변의 수령들을 함부로 옮겨 쓰지 못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렸는데도 진주 등 4∼5개의 고을 수령들까지 바다로 나아가게 하였다고 합니다. <<중략>> 도원수가 수군과 육군을 모두 관장하여 완급과 이해를 보아가며 편의한 바를 힘써 찾아 좋은 방향으로 조처하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회유(回諭)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위 기사를 살펴보면, 당시 조정이 직접 중재해야만 할 정도로 육군과 수군 사이의 갈등이 심상치 않았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이순신의 장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순신은 다섯 차례에 걸쳐 조정에 장계를 올려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요청하였다.
1. 수군에 소속된 고을 수령들은 수전에 전속될 것: 「청주사속읍수령전속수전장(請舟師屬邑守令專屬水戰狀)」(1593년 4월 6일),
2. 연해 고을의 군병과 군량과 병기는 수군에 전속될 것: 「청연해군병량기전속주사장(請沿海軍兵糧器全屬舟師狀)」(1593년 윤11월 17일)
3. 수군에 소속된 고을에는 육군을 배정하지 말 것: 「청주사소속읍물정육군장(請舟師所屬邑勿定陸軍狀)」(1593년 윤11월 21일)
4. 연해 고을의 군량과 병기를 육군으로 옮겨가지 말 것: 「청연해군병량기물령체이장(請沿海軍兵糧器勿令遞移狀)」(1593년 12월 29일)
5. 육군과 수군이 연해 고을에서 함께 징발하는 폐단을 금지할 것: 「청금연읍수륙교침지폐사장(請禁沿邑水陸交侵之弊事狀)」(1594년 1월 16일)
통제사 이순신은 『난중일기』에도 두 차례 정도 도원수 권율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서술하였다. 어지러운 전쟁 기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통신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었으니 서로 만나기 어려운 두 사람 사이에 이러한 갈등이 생긴 바는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갈등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점은 두 사람이 서로 만나 대화를 통해 그 갈등이 거의 곧바로 해소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4년 8월 17일
흐리고 저물녘에 비가 내렸다. 원수(권율)이 12시경에 사천에 이르러 군관을 보내어 이야기하자고 청하기에 곤양군수(이광악)의 말을 타고 원수가 머무르는 사천현감(기직남)의 거처로 갔다.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례를 하고 이어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오해가 풀리는 기색이 많았다. 원 수사(원균)를 몹시 견책하였는데 원 수사가 고개를 들지 못하여 우스웠다. 가지고 갔던 술을 마시자고 청하여 8순을 돌렸는데, 원수가 몹시 취해서 헤어졌다. 헤어져 숙소로 돌아오니 박종남과 윤담이 와서 만났다.
『난중일기』 1594년 8월 18일
아침에 식사를 한 뒤에 원수(권율)이 청하기에 가서 이야기하였다. 또한 작은 술자리를 차렸는데 크게 취해서 돌아왔다.
위 『난중일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순신은 '오해가 풀리는 기색이 많았다'라는 간단한 표현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호전되었음을 서술하였다. 실제로 이 두사람이 만난 뒤로 육군과 수군 사이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기록은 찾기 힘들다. 인물이 인물을 알아본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권율과 이순신의 관계는 1597년 이순신의 백의종군 시기 『난중일기』 기록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27일
일찍 출발하여 송치 부근에 이르니 구례현감(이원춘)이 사람을 보내어 점심을 짓고 돌아갔다. 순천 송원에 이르니 이득종, 정선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에 정원명의 집에 이르니 원수(권율)가 내가 온 것을 알고는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조문하고 또한 안부도 물었는데, 위로하는 말이 매우 간곡하였다.
* 권승경: 권율의 조카이자 그의 막하에서 활동하였다. 원문은 ‘權承慶’으로 적혀 있지만 ‘權升慶’이 올바른 표기이다. 그의 자는 형길(亨吉), 본관은 안동(安東), 생몰년은 1564년~미상이며, 행주대첩에 참전하였다. 권승경의 이름은 행주대첩에 대해 기록한 「원수권공행주대첩비」 후반부에는 실린 참전 장수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28일
아침에 원수(권율)가 다시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이어 “상중이라 몸이 피곤할 것이니 몸이 회복되는 대로 나오시오. 이제 ‘친한 군관이 통제사가 있는 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와 공문을 보내어 나오게 하였으니 데리고 가서 간호를 받으시오.”라고 말을 전하며 편지와 공문을 만들어 왔다.
당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은 그의 어머니 초계변씨의 상까지 당하여 고통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권율은 그의 조카인 권승경을 두 차례 보내어 조문을 하고, 이순신의 편의를 봐주는 조처까지 취하였다. 권율은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는 동안 그와 군사 문제 등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특히 칠천량해전 직후 일에 대해 이순신과 논의하고, 이순신이 사후 수습을 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였다. 다음은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7년 7월 18일
새벽에 (중군장) 이덕필과 (군관) 변홍달이 와서 “16일 새벽에 수군이 야간 기습을 받아서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최호)와 여러 장수 등 많은 사람들이 해를 당하고 수군이 대패하였다.”라고 말을 전했다. 듣다 보니 통곡을 참을 수 없었다. 얼마 있다가 원수(권율)가 와서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오전 10시경까지 이야기하였지만 뜻을 정할 수 없었다. 내가 “내가 연해 지역으로 가서 보고 듣고 나서 대책을 정하겠다.”라고 하였더니 원수가 기뻐해 마지않았다.
『선조실록』의 기사(90권, 선조30년-1587년 7월 26일 을묘 5번째 기사)에 따르면, 권율은 조정에 보고서를 보내 칠천량해전의 패전 상황을 설명하면서, 흩어진 배를 수습하도록 이순신을 들여보냈다는 내용을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비록 짧게 서술한 문장이지만, 당시 이순신이 백의종군 중이던 사실을 감안하면 권율이 이순신의 입장을 배려하여 의도적으로 언급한 것 같다.
이항복이 이순신의 유사인 「고통제사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를 쓴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항복은 임진왜란에 깊은 관심이 있어서 그의 문집 『백사집』에는 권율의 유사나 유성룡의 유사 등도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순신의 유사를 지은 이유가 혹시 이항복이 권율의 사위였던 사실도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조성도 역주, 『임진장초』, 2010(중판), 연경문화사
한국고전종합DB, 이항복(李恒福)의 『백사집(白沙集)』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