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금은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물품이다. 몸 안의 소금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기능장애를 초래한다고 한다. 물자가 풍부하지 못했던 고대 사회에서 소금이 값비싼 물품이었음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조선시대 또한 소금이 귀한 시기였기 때문에 국가가 대부분의 소금 생산을 직접 관리하였다. 예를 들어 조선 초기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를 살펴보면, 소금 생산에 사용되는 소금가마를 관리할 목적으로 각 지방의 소금가마가 위치한 곳을 조사하여 「염분(塩盆)」이라는 항목으로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사실 조선시대 소금 산업은 매우 복잡한 주제로서 학자들에게도 어려운 분야이다. 그러므로 본 칼럼은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소금가마가 언급된 이유만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1595년 5월의 『난중일기』에는 소금가마를 주조하여 만들었다는 언급이 세 차례 나타난다. 아래는 해당 기록의 일부를 옮겨놓은 것이다.
『난중일기』 1595년 5월 17일
이날 소금가마 하나를 주조하여 만들었다.
[원문] 是日 塩釜一坐鑄成.
『난중일기』 1595년 5월 19일
저녁에 소금가마 하나를 주조하여 만들었다.
[원문] 夕 塩釜一坐鑄成.
위 일기에 보이는 소금가마를 의미하는 '염부(塩釜)'는 조선시대에 대개 ‘염분(鹽盆)’으로 표기되었으며, 『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서 그 용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난중일기』에는 소금가마를 만든 이유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소금은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동시에 가격이 비싼 물품이었으므로, 조선 수군에서 직접 소비하거나 군비를 확충할 목적이었을 것이다. 당시 전쟁으로 인하여 물자 수급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임진왜란 시기 군량이 부족하여 조선 수군이 둔전을 활용하여 곡식의 일부를 수급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소금가마를 주조한 일 또한 둔전의 운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아래는 당시 소금 수급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보여주는 『선조실록』의 기사이다.
『선조실록』 권46, 선조26년(1593) 12월 18일 정묘 9번째 기사
비변사가 답하여 아뢰기를,
"<<중략>> 지금 비록 민생이 다 없어져 소금을 구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만, 경기·황해·충청·전라도 등의 해변은 모두 소금을 구울 수 있는 곳으로 소출 또한 많습니다. <<중략>> 중신(重臣) 한 사람에게 그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해변을 순시하게 한 다음 염호(鹽戶: 소금 굽는 일을 업으로 삼는 민호)를 불러모아 염분(鹽盆)을 설치하고 소금을 굽게 하소서. <<중략>>"
라고 하였다.
그러면 소금 생산에 사용되는 소금가마는 도대체 어떻게 쓰는 물건이었을까? 조선시대의 소금 생산은 주로 바닷물을 소금가마에 부어 끓여서 만드는 '자염(煮鹽)'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지역과 자연조건에 따라 그 생산 방식도 차이가 있었다. 동해안에서는 바닷물을 직접 끓여서 생산하였고, 서해안과 남해안에서는 염전을 조성한 뒤 염분의 농도가 높은 물을 끓여 생산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시기 소금 수급에 관한 문제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요구되는 주제이다. 본 칼럼에서는 『난중일기』의 기록을 통하여 당시 조선 수군의 소금 수급 상황의 단면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참고자료]
고광민·김의환·김일기·최성기·홍금수, 2006, 『조선시대 소금생산방식』, 신서원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경상도속찬지리지』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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