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아랑가] 징기스칸

랄프 시겔(독일) 작곡, 김재종 개사

유차영

몽골국, 전 국토를 일주(일주라고 할 만한)하는 드라이빙 유목 투어를 다녀왔다. 66세에 서하 정벌 도중, 낙마로 인하여 발병한 열병 후유증으로 유목 정벌의 일생을 마감한, 징기스칸이 질주하던 그 평원, 초원, 사막을 종횡했다.

 

​숙식은 몽골국의 이동식 숙소인 게르, 매일 4~7백 킬로미터의 포장/비포장도로를 내달리며, 새로운 장소에서 스스로 야전 침낭 펴고 접기를 반복했다. 유목 노마드의 체험형 투어이다.

 

평원, 초원의 가르마처럼 굽이진 비포장 노면과 모랫길을 내달리는 4륜구동 10인승 승합차에서 내다본 사방의 지평선, 간간이 보이는 구릉과 민둥산, 일부러 찾아간 협곡과 사막, 곳곳에서 나는 징기스칸의 실루엣을 마주했다.

 

망망한 초원의 수천마리 양 떼, 고삐와 안장이 채워지지 않은 야생마들의 한가로운 목양, 스스로 흩어지고 모이는 등 굴곡진 낙타 떼, 야생동물들의 휘몰이 개와 오토바이와 말을 탄 목동들의 내달리고 멈춤의 수려함, 아주 간간이 띄엄띄엄 하얀색 가마솥처럼 올망졸망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게르~. 그 어느 곳에도 징기스칸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래서, 황야에서 머금은 여독이 풀리기도 전, 우리나라의 1960년대 식 같은, 몽골국 변두리의 재래 화장실에서 베인 구린내가 가시기 전에, 1979년 조경수의 목청을 타고 세상에 나온 <징기스칸> 노래를 펼친다.

 

그 언젠가 누군가 들려주는 이야기 / 후하후하 /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아름다운 이야기 / 후하후하 / 약한 자를 도우며 사랑했네 / 슬픈 자는 용기를 주었다네 / 내 마음속 영웅이었네 / 후하후하 / 징징징기스칸

 

하늘의 별처럼 모두가 사랑했네 / 징징징기스칸 / 내 작은 가슴에 용기를 심어줬네/ 겁 많던 내게 / 워허허허 / 용기를 주었네 / 워허허허 / 내 마음속 영웅이었네 / 꿈과 용기를 간직하였네.

 

이 <징기스칸> 노래는, 1227년에 사망한 징기스칸이 752년 만에 환생한 절창이다. 독일의 6인조 혼성그룹, 징기스칸의 데뷔곡, 이 멜로디가 우리 아랑가로 천이되어, 조경수 김상희 나미 등이 열창을 했다. 조경수의 노래는 ‘방송부적격’이라는 올무에 걸려서 금지곡으로 수난을 겪기도 했다.

 

몽골국의 제1대 왕 칭기즈칸은, 1206년 봄부터 1227년까지 왕좌를 지키면서 세계(동에서 서까지)를 정복한 군주다. 휘는 보르지긴 테무친, 묘호는 태조(太祖), 우리말로는 성길사한(成吉思汗)이다. 1162년 11월 12일, 몽골 울루스 오논강에서 출생하여 1226년 사망하였으니, 향년 66세의 세수를 누렸다.

 

필자 활초는 지금 66세의 늦여름을 단월활초옥루, 느티나무 아래서 이 글을 적고 있다. 긴 세월 몽골국 유목투어를 염두하였다가, 징기스칸의 전장 전사 나이, 66세인 올해 결행한 이유이기도 하다. 해발고도 2천여 미터, 모래산 3백여 미터, 고비사막의 서남방 130여 킬로미터 저 멀리는 중국이다. 고비사막은 몽골어로, ‘풀이 자라지 않는 모래 언덕’이다.

 

징기스칸은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군사·정치 지도자로, 청나라 때는 특목진(特穆津)으로 지칭되다가 청나라 멸망 후 테무진으로 이름이 원상 복구되었다. 그는 1189년 카마그 몽골의 칸으로 즉위했고, 1206년 전 몽골 제국의 칸으로 즉위했다. 존호인 징기스칸는, 1206년 전(全) 몽골의 칸으로 즉위하면서, 몽골 부족장들이 명명 건의한 존호이다.

 

중화민국 건국 이전, 중국에서는 그를 성길사황제라 칭했다. 그는 몽골국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능력주의에 기반한 강한 군대를 이끌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이자, 성공적인 군사지도자 및 인류 최대의 정복군주로 평가되지만, 반대편에서 침략당했던 동유럽권과 서아시아에서는 학살자이자 약탈자, 문명의 파괴자라는 평판도 존재한다.

 

그가 9세 때, 몽골 왕족 보르지긴족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 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다. 예수게이는 아들 테무친의 배우자를 정하러 옹기라트부족의 족장을 만나, 그의 딸 보르테를 테무진의 약혼자로 정하고 오던 길에, 타타르족의 막사에서 며칠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몽골 부족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타타르족은, 예수게이를 독살하였다.

 

이로 인해 테무진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 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 등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하지만 징기스칸은 야망과 정복과 포용과 통합의 지도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이러한 과정과 결과가 새로운 시작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이러한 DNA는 오늘, 활초가 내달린 드라이빙 유목 투어, 어느 곳곳에서 되새김해 낼 수가 있었을까. 쉽지 않은 역사 반추적인 염력이었다.

 

1226년 여름, 마침내 징기스칸은 서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몽골군은 서하의 수도 흥경을 포위했다. 그때 징기스칸은 육반산 남쪽에서 야영했다. 육반산 남쪽에 머무르던 칭기즈 칸은 서하에 사람을 보냈고, 서하에서는 곧 항복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해 8월 초 칭기즈 칸은 갑자기 중태에 빠졌다가 깨어났다. 말에서 낙마한 후, 열병을 앓은 후유증상이었다.

 

이때, 죽음을 앞둔 징기스칸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적이 알지 못하도록 절대로 곡을 하거나 애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66세였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 관음포에서, 왜군을 추격 격멸 추방하는 승리를 하고서도, 현장에서 순국한 이순신 장군의 유언과 같다. 영웅은 이승을 등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영혼을 흐트리지 않는가.

 

전방급신물언아사(前方急愼勿言我死), 전방의 전투가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이순신 장군의 순국은 54세였다. 세종대왕, 제갈공명도 54세에 생을 마감했다.

 

징기즈칸은 주변국을 정복하면서, 항복 후 협력하면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바그다드와 이스파한 등에는 10만여 개가량 되는 해골로 탑을 쌓기도 했다.

 

징기스칸은, 계급이 미천한 자라도 능력이 있다면 귀히 쓰지만, 능력이 없는 자라면 계급을 강등시켰다. 또한 이민족이라고 해도, 능력이 출중한 사람은 기용하는 개방적인 인재 흡수정책을 단행했다.

 

또한 징기스칸의 군대는 승마 능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군대였고, 원거리 이동이 잦은 상인(카라반 상단)들을 통한 정확한 정보수집을 하였으며, 다른 종교(기독교, 이슬람)에 대한 존중하였고, 정복하고자 하는 나라가 다종교사회인 경우, 특정 종교를 지지하여 내분을 조성함으로써 특정 종교의 치우침을 예방했다. 특히 학자인 야율초재를 기용하여, 학식을 군사에 활용했다. 특정 지역의 특산물 등을 조세(공납)의 대용으로 활용한 것 등이 그 예다.

 

2024년 8월의 몽골국 수도는 울란바토르이다. 정치체제는 대통령 중심의 공화제 집권여당은 몽골인민당이며, 1991년까지 공산주의 국가였다. 1924년 북양정부으로부터 독립, 1992년부터 현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인구는 356만여 명, 우리나라 부산 시민 숫자와 비슷하다.

 

몽골 제국 제5대 칸인 쿠빌라이칸 시절에는 국호를 ‘원나라’로 개칭했었고, 이후 명나라의 공격을 받고 몽골 지역으로 이동하여 국호를 ‘북원’으로, 1688년부터 ‘외몽골’로 불렸다. 원나라는 역사의 노정에서, 우리나라와 바둑판 위의 복기처럼, 되새길 일이 많은 나라다.

 

국가의 명칭은, 몽골 올스 몽골국이다. 몽골 올스에서 ‘몽골’은 ‘용감한’이라는 뜻을 가진 부족 이름에서 유래된 명칭, 민족이름을 뜻하고, ‘올스’는, ‘나라 또는 국가’를 의미한다. 그러니 ‘몽골민족의나라’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까지 몽고라고 불렀다. 이후 1990년에 외교관계를 수립한 몽골 정부가, ‘몽고’라는 표현은 오랫동안 몽골족에게 시달려왔던 중국인들이,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를 조합’하여, 몽골족을 비하하기 위해 만든 단어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에 한국어국명변경을 요청했다. 이에 국립국어원은 1991년 9월 11일 열린, 제1차 정부언론외래어심의공동위원회를 통해, ‘몽골국’으로 결정했다.

 

몽골국은 지리적으로 동아시아다. 국토는 서쪽은 알타이, 항가이라고 하는 큰 산맥, 남쪽은 바위와 모래가 전부인 고비사막, 동쪽은 아무것도 없는 초원, 그리고 북쪽은 후브스굴호와 사람이 뚫고 지나가기 불가능한 시베리아의 남쪽 산림(타이가)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발고도는 평균 1,500m 정도다. 흥안령을 기준으로 내몽골 외몽골로 구분하기도 한다.

 

몽골국의 18세~25세 남성들은, 1년간 복무해야 하지만 생업에 종사하거나 학생, 질병이 있는 자 등은 징병이 면제되고, 현역복무와 병역세납부 중 양자택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복무율은 낮다. 몽골에서 병역 면제세는 159만 투그릭(우리 돈 70만 원)이다.

 

몽골군은 몽골 국군(육군과 육군항공대가 통합)과 국경수비대, 전투경찰(경찰소속)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륙국이라 해군이 없다. 몽골국군은 통합군으로, 1만2천여명이며, 국경수비대는 8만5천여 명, 전투경찰(경찰)은 2만여 명이다.

 

저들이 품고 있는 징기스칸의 혼은 무엇일까.

 

1979년 조경수는 왜, <징기스칸>을 부르다가 금지곡 딱지를 받았을까. 그 시절은 1975년 긴급조치 9호, 대마초파동(해피스모그사건) 이후, 우리 대중가요학살기시대의 터널 속이었다. 그 시절 불려진 유행가 아랑가는,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 조경수의 <돌려줄 수 없나요>, 최병걸의 <진정 난 몰랐었네> 등이다. 

 

 

[유차영]

한국아랑가연구원장

유행가스토리텔러 

글로벌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경기대학교 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교수

이메일 : 519444@hanmail.net

 

작성 2024.08.07 09:59 수정 2024.08.0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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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