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이순신 전적지 전알도(全謁島)는 견내량의 다른 이름

안방준의 '은봉전서'에 전알도를 넘나드는 왜군 상황 6회 등장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나 장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지명 가운데 하나가 견내량(見乃梁)이다. 견내량은 경남 통영시 용남면과 거제시 사등면 사이의 좁은 해협이며 적은 병력으로 왜군 대군을 막아낼 수 있는 해상 관문이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1593년 7월 여수에서 한산도로 진을 옮기고 견내량을 지켰다. 견내량은 바다에서 조류가 냇물처럼 흐르는 곳이라 하여 현지인들은 '개내' 또는 '갯내'라 했는데, 한자도 음차 하여 '견내(見乃)'가 되었다. 

 

견내량 

 

고려 무신정권 때인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거제도의 폐왕성(지금의 둔덕면 거림리)으로 귀양을 온 고려 의종(1127~1173년)이 배를 타고 건넜던 견내량은 임금인 전하(殿下)가 건넜다고 하여 ‘전하도(殿下渡)’라는 구전 지명이 전한다. 1959년에 만들어진 『경상남도지명조사철』은 ‘견내량(見乃梁)’과 ’전하도(殿下渡)’의 지명과 함께 그 지명 유래를 기록하였다.

 

[경상남도 거제군 사등면 지명조사철 – 자료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정보플랫폼]

 

지명 ‘전하도’가 변형되어 ‘견내량’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는데,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의 「거제현(巨濟縣)」에 이미 지명 ‘견내량(見乃梁)’이 등장하는 점으로 보아 견내량은 전하도가 변형된 지명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지명일 가능성이 크다. 전하도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찾기 힘들다. 만약 조선시대에 고려 왕 의종을 ‘전하’로 칭한다면 불경죄 또는 심할 경우 역모로 몰릴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안방준(安邦俊, 1573~1654년)의 문집인 『은봉전서(隱峯全書)』에는 1592년 조선 수군의 활약을 기록한 「부산기사(釜山記事)」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부산기사」의 내용에는 전하도와 구음이 비슷한 ‘전알도(全謁島)’라는 지명이 6차례 등장한다. 전하도와 전알도는 비록 그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두 지명의 구음이 유사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부산기사」에서 전알도가 등장하는 앞뒤 기록을 살펴보면, 그 기록의 정황으로 보아 전알도가 전하도를 가리키는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다음은 전알도가 등장하는 「부산기사」의 주요 기록이다.

 

이순신이 좌·우척후, 좌부, 전부 6~7척의 배에 명령하여 그들을 추격하니 적이 많이 패하여 죽고 뭍으로 내려 도망쳤다. 이때 아침 해가 막 떠오르고 바다 기운이 아직 걷히지 않았는데, 적선이 전알도의 운무 사이에서 무수히 나왔다. (舜臣令左右斥候及左部前部六七船 追擊之 賊多敗死 下陸而走. 時朝日初昇 海氣未收 賊船自全謁島雲靄間 無數出來.)

 

위 내용은 당포해전 전투 기록으로서, 조선 수군이 전투를 치르고 있는 중간에 외부에서 또 다른 왜선 선단이 다가온 사실을 서술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인 「당포파왜병장」에도 비슷한 기록이 실려 있다. 「당포파왜병장」은 당포해전 중간에 왜대선 20여 척이 소선을 많이 거느리고 거제로부터 다가왔다고 기록하였다. 거제에서 당포(지금의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로 오려면 견내량을 지나야 하므로, 위 기록에 나타난 전알도는 정황상 견내량일 가능성이 크다.

 

이순신이 이억기의 군사를 합치고 동쪽으로 전알도에 이르니 피난하던 거제 사람이 해안 위로 나와 외치며 말하기를 “지난밤에 적선이 당포에서 나와 한산을 넘어 전알도를 지나 고성의 족슬포로 들어가서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고 하였다. (舜臣合億祺兵 東至全謁島 巨濟人避亂者 臨岸上呼曰 昨夜賊船 自唐浦踰閒山 過全謁島 入于固城之族瑟浦 時未出也.)

 

당항포해전 당시 견내량 주변 상황도

위 내용은 당항포해전 직전 기록으로서, 당포해전 이후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 수군이 당포에서 합세한 다음 당항포에 주둔한 왜선 선단을 추격한 사실을 싣고 있다. 이 또한 이순신 장군의 장계인 「당포파왜병장」에 비슷한 기록이 실려 있다. 당포에서 당항포로 가려면, 한산도를 지나 견내량을 건너가야 하므로, 이 기록에 언급된 전알도는 견내량으로 봐야 한다.

 

21일에 당포에서 머물다가 적이 거제에서 나와 흉도(거제시 사등면 오량리 고개도)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2일에 전알도에 급히 이르러 적선이 지도(통영시 용남면 지도리 지도)에 주둔한 것을 보았더니 그 기세가 당당하여 전일과 달랐다. (二十一日 次于唐浦 夜聞賊自巨濟 向于胸島. 二十二日 馳至全謁島 見賊船屯于紙島 其勢堂堂 非復前日之比.) 《중략》 적의 모든 병사가 우리를 쫓아 일순간에 전알도를 넘어 거의 한산의 큰 바다를 지날 때 우리와 매우 가까운 거리가 되어 그 선봉이 벌써 방답의 거북선에 거의 다가갔다. (賊悉兵追我 一瞬息間 踰全謁島 幾過閒山大洋 距我咫尺 而其先鋒已迫防踏龜船.)

 

위 내용은 한산도대첩 직전 기록으로서, 이순신 장군의 장계인 「견내량파왜병장」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위 내용은 조선 수군이 전알도에 이르러 왜선이 지도에 주둔한 것을 확인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전투 현장을 직접 답사하여 확인해보면, 통영시 용남면 지도리 지도 부근을 배를 이용하여 정찰하기 위해서는 견내량 북단까지 다가가야만 시야 확보가 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위 내용에 언급된 전알도 역시 견내량으로 추정된다.

 

위 내용은 또한 왜선이 조선 수군을 쫓아 전알도를 넘어 한산의 큰 바다를 지났다고 하였는데, 지도에 정박했던 왜선이 조선 수군을 쫓아 가려면 견내량을 넘어야 한산도에 이를 수 있으므로 전알도를 견내량으로 보아야 내용의 정황이 자연스럽게 맞아 떨어진다. 

 

전알도(全謁島)라는 지명에 섬 '도()'자가 들어가지만, 견내량에서 한산도 사이에는 당시 지명으로 침도(방화도), 적도(화도)가 있을 뿐 전알도라는 지명은 없다. 차자표기 과정에서 전알도(全謁渡)라고 표기해야 할 것을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면 전알도는 견내량을 가리키는 것이 거의 틀림없다. 지명 전알도는 임진왜란 시기 현지 사람들이 전하도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한자로 차자표기한 지명으로 보인다. 지명 ‘전알도’는 ‘전하도’의 지명 유래를 최소한 임진왜란 시기까지 끌어올려 줄 수 있는 근거로 해석된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장 

https://yisoonsin.modoo.at

 

작성 2024.09.01 19:40 수정 2024.09.01 19:43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이란에 말바꾼 트럼프의 진짜 속내는?
2025년 6월 16일
2025년 6월 16일
2025년 6월 15일
2025년 6월 15일
2025년 6월 15일
2025년 6월 15일
2025년 6월 15일
[ESN쇼츠뉴스]‘2025 인천국제민속영화제(IIFF 2025), 이장호..
[ESN쇼츠뉴스] 킹오브킹스 K애니로 만나는 예수 K 애니로 탄생 킹오브..
[ESN쇼츠뉴스]봉사 / 환경 / 고양재향경우회, 국민과 자연 잇는 자원..
[ESN쇼츠뉴스]김명수 응원 인천 민속영화전통과 영화가 만나는 자리 인..
천재 로봇공학자의 ADHD 고백 #제이미백 #스위스로잔연방공과대학 #로보..
세상에서 학력보다 중요한 것은?#닌볼트
생존 문제가 된 은퇴, 평생 먹고 살 대책안은? #은퇴자금 #은퇴전문가 ..
100만 유튜버의 숨겨진 실패 스토리, 이런 과거가?
토막살인은 이 때 나온다! #형사박미옥
전직 아이돌에서 페인트 업체 대표가 된 비결?(feat.긍정의 힘) #오..
요즘 친환경 플라스틱은 생분해가 아닌 바로 이것! #친환경플라스틱 #친환..
왕따가 곧 사라질수밖에 없는 이유?!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