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 속의 시골 마을은 언제 보아도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폭의 그림 같다. 담장은 낮고 먹감나무 품은 넓다. 집집이 평상 하나쯤 바람길 시원한 그늘에 정물화처럼 놓여 있다. ‘쉼’이란 글자란, 네모난 평상 위에 사람들이 앉아 편하게 쉬고 있는 그림문자 같다며 혼자 억지를 부려본다. ‘빨리’란 낱말이 낯설어지고, ‘똑딱’ 시계 침 소리도 느려지는 것 같다. 멀리서 초대라도 받은 손님처럼 넌지시 한번 앉았다가 가고 싶다.
주로 바깥에 두고 앉거나 드러누울 수 있도록 만든 평평한 상이다. 바닥에 좁은 나무오리나 대오리의 살로 만든 살평상과 나무 널빤지를 연결한 널평상이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오래전부터 한민족의 주거생활에 필수적인 가구였던 것 같다. 전통 한옥의 특징이 건물과 마당이라면 평상도 그 마당의 일부분이고 건축의 한 동선이 아닐지 싶다.
용도가 다양하다. 마루도 아닌 것이 거실처럼 가족의 주거 공간이고, 의자 용도의 쉼터이고, 부엌처럼 식사의 장소이고, 그늘을 덮고 누워 오수를 즐기는 침상이고, 나물 같은 재료들을 말리는 건조장이고, 마늘을 까고 채소를 다듬는 작업장이고, 입담 좋은 길손들의 사랑방이다. 시집 한 권 펼치고 앉으면 서재이고, 훈수꾼 기대어 서고 장기나 바둑 한판에 떠들썩한 놀이판이 되기도 한다.
크기나 모양도 자유자재다. 정해진 규격이 없어 공간이나 용도에 맞으면 그만이다. 모양도 장방형이든 정방형이든 상관없고, 높이도 엉덩이 편하게 걸터앉기 좋을 정도면 된다. 두 개든 세 개든 마음대로 붙였다 떼었다가 언제든 확장과 축소가 가능하다. 나무로 만든 보자기나 다름없다. 불확정적인 상황에 적절하게 변용하는 일처럼 세상도 그렇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
붙박이를 고집하지 않는다. 마당을 둥둥 떠다니는 이동식 마루다. 상황에 맞게 변화를 수용하여 서늘한 계절은 따사로운 햇살로, 더운 계절은 시원한 나무 그늘로 옮겨 다닌다. 앞마당이든 뒷마당이든, 어느 날은 대문 밖 골목길로 진출하기도 하고, 옥상이나 넓은 베란다에도 맞춤 맞게 자리 잡는다. 소통도 타협도 못 하고 자기 아집에 제 자리만 고집한다면 천덕꾸러기가 될 수도 있는 문제다.
산속에 농장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다락방 같은 집이지만 마당에 커다란 평상이 있었다. 때때로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가도 그 평상만 있으면 밥도 먹고, 삼겹살도 굽고, 이야기꽃도 피우며 하루 종일 다른 장소가 필요치 않았다. 산새들 머리 위로 날아다니고, 산바람은 목덜미를 간질이고, 서산에 지는 노을빛은 보석처럼 아름다워서 평상이 있는 풍경이 특별한 시공간으로 평행 이동이라도 한 것 같았다. 쫓기고 쫓아가며 허겁지겁 살아가던 일상에 달팽이 같은 시간을 아껴먹던 평온이 아니었나 싶다.
평상 곁에 걸터앉으면 입식이지만, 마주 보고 앉으면 좌식의 공간이 된다. 같은 마룻바닥이라도 서양의 데크와는 다르다. 데크는 이동의 공간이지만 평상은 멈춤의 장소이다. 그 멈춤에서 쉼과 놀이와 주거가 시작되고 삶의 여유와 여백이 보인다. 가구 하나 없이도 의자며, 침대며, 탁자의 역할을 한다. 단순하고 간편하다. 쉬운 것이 편하고 좋은 것이다.
구들이 없는 방이고 벽이 없는 창이다. 걸터앉거나 올라앉거나 어느 방향이든 출입구다. 내가 가는 길이 곧 정문이다. 평상 앞에서는 모든 이가 평등하고 공평해진다. 앉는 자리의 높낮이도 없고, 미리 정해놓은 위치나 방향도 없다. 윗목 아랫목은커녕 등받이도 없어 모두 저 스스로 등줄기를 꼿꼿이 세워야 한다. 평상은 비록 무릎 높이의 낮은 곳에 위치하지만 벽이나 기둥이 없어 시선을 차단하거나 바람길을 막는 법이 없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어린 시절 평상이 있었다. 스멀스멀 봄꽃이 피어나는 어느 날, 망치와 톱을 들고 나선 아버지가 온종일 나무를 자르고 못질하며 비지땀을 흘렸다. 그 이후로는 숙제도 간식도, 꽃도 별도, 무논에서 개구리 짝자글 울어대는 소리도 그 평상에서 들을 수 있었다. 널빤지 틈새로 올라오는 시원한 골바람에 꿀맛 같은 낮잠을 자고 나면, “늦었다! 빨리 학교 가거라!” 능청스러운 거짓말에 속아 책가방을 들고나오던 그때 그 시간.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날들이다.
가구지만 집 밖의 가구다. 빗줄기나 눈보라도 맨몸으로 견뎌야 하고, 뜨거운 햇살이나 흙먼지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멋을 내는 일도 없고, 고급스러운 의자처럼 장식이나 무늬를 새기는 일도 없다. 올망졸망한 자식들 품 안에 거둔 듯 평생 넘어지거나 무너지지 않기만 염원할 뿐이다. 어쩌면 평상은 아버지의 터 같다. 칼바람도 아랑곳없는 근육질이 되어 한없는 희생과 헌신만 하는 세상 아버지들 말이다.
의자가 ‘나’라면 평상은 ‘우리’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이다. 평상은 개인석이 아니라 단체석인 너럭바위다. 아무도 없을 때는 텅 빈 허공 같지만 언제라도 왁자지껄 생의 열기가 피어오르는 집안의 중심부다. 그곳엔 비밀도 없고, 숨겨둔 상처나 원망의 부스러기들은 없다. 대화가 흐르는 이해와 소통의 자리이고, 배려와 공감이 넘쳐나는 공동체의 한 구역이다.
요즘 사는 집은 마당이 없어 평상도 없고, 독신가구가 많아 평상이 필요치도 않다. 혼밥과 혼술, 모여서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가 더 편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인간적인 교류가 없는 것은 아닐 터,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서로의 표정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한번 초대해 볼 일이다. 비어있어 채울 수 있고, 외로울수록 품을 내어줄 수 있는 곳은 평상이 제격이다.
노인이 혼자 평상에 걸터앉아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지 초점 없는 눈가엔 노을이 짙다. 어쩌다 멀리서 자식들 발걸음 소리 들리는 날이면 입가에 화들짝 웃음꽃 피고 평상은 또 식구들 등쌀에 몸살이 날 것이다. 그런 떠들썩한 날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허정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