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이 말을 현대인도 간혹 사용한다. 나라에 충성이 아닌 사람한테 충성할 때 이르는 말이다. 한 사람한테만 충성하지 두 사람한테 충성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사기”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오늘날까지 절개와 올곧음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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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연천군 전곡읍 시가지 북쪽 끝에서 서쪽으로 수백 미터 가면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천연적인 현무암 주상절리 수직절애가 있다. 병풍처럼 사방을 감싸며 우묵하게 솥단지 형세를 한 반곡(盤谷) 지형이다. 이곳 지명은 ‘음터’이다.
‘음터’에서 한탄강 건너 남쪽에 ‘국사봉’이라는 봉우리가 바라보인다. 북서쪽 끝 장진천 절벽 위에 ‘학소정’이라는 옛 정자가 있던 곳도 보인다.
‘음터’, ‘국사봉’, ‘학소정’, 이 세 곳의 지명은 고려 우왕 8년에 이방원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교우가 두터웠던 진사를 지낸 고려 말 5충신 중 한 명인 일노정 김양남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고려가 망하여 조선이 개국하자 일노정은 ‘음터’에 은일하며 매일 같이 ‘국사봉’에 올라 망국의 한을 달래고자 고려 도읍지 개성을 향해 통곡하며 배례를 올렸다 한다. 이것에 연유하여 숨어 지내는 곳이라는 의미로 ‘은터’라 불리다 오늘날 ‘음터’로 음이 변하였다.
한자로 ‘은대(隱垈)’라 하여 오늘날 행정명 ‘은대리(隱垈里)’로 남아 있다. 일설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태종 방원과 사이가 좋지 않아 함흥으로 도피할 때 이곳 김양남의 집에 보름간 숨어 지냈다는 연유에서 명명한 것이라 한다.
조선 태종이 그의 절개에 감동을 받아 여러 번 벼슬을 제수하였다.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빼어난 경치와 운치가 있는 천연적인 단애로 형성된 한탄강과 장진천, 국사봉 등 산수와 벗 삼아 ‘음터’ 북서쪽에 초정(草亭)인 ‘학소정’을 짓고 평생을 고려 신하로서 절의를 지키며 살다 갔다.
학소정은 일노정이 은거할 때 그의 절개를 찬양이나 하듯, 이 일대에 학들이 날아들어 서식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가 죽자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는 죽어서도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키기 위함인지 한탄강 남쪽 편 전곡읍 고릉리 골짜기에 국사봉을 ‘안산’으로 삼아 묻혀 있다.
풍수지리를 아는 지역 주민들은 이 국사봉을 ‘면경산(面鏡山)’이라 부른다. 북쪽에 마주 보이는 빗접산이 옥녀산발형 형국인데 미녀가 머리를 풀고 앉아 머리를 빗을 때 마주 보는 거울이라는 의미이다.
일노정은 거울을 바라보지 않고 좌측 뒤에서 국사봉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죽어서도 은거하면서 국사봉에 올라 망궐례를 올리기 위함일 것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충절을 지키는 우리 조상들의 얼을 되살려 봄이 어떨까. 나아가 나라 잃은 망국의 한풀이 충절보다는 나라를 보전하기 위한 충절을 앞세워 봄이 어떨까?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대구과학대학교 겸임조교수, 가야대학교 강사.
저서 : 평론집 7권, 이론서 2권, 연구서 2권, 시집 5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