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가 떠난다는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곳이 특별한 인연이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떠나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쓸쓸하다. 그것도 비가 내리는 날 떠나야 하고 보내야 한다는 것은 더욱 슬퍼지는 것이다. 한곳에 오래도록 머무를 수 없이 세계의 여러 항구를 드나들어야 하는 선박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화물을 가득 싣고 출항을 앞둔 배는 착 가라앉은 모습으로 듬직하게 버티고 있었다. 떠나기를 싫어하기라도 하듯이. 한 편으로는 그 어떠한 파도에도 흔들림 없을 것 같은 든든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으로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인도양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큰 파도와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다.
몇십 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인도네시아의 파당Padang이라는 항구에서 출항을 앞두고 있었다. 모든 출항 점검을 끝내고 떠나기가 아쉬운 시간에 잠시나마 나의 침실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심한 바람이 불더니 뱃전의 철판을 뚫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큰 소리를 내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열대지방에서 하루에 한 차례씩 지나가는 스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비였다.
오후에 간간이 내리는 열대지방 특유의 비겠거니 생각했다지만 그러한 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양이 줄기차게 내렸다. 창문 너머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내린다면 주위를 온통 물바다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진한 먹구름을 동반한 비였다.
어릴 적 한 여름날 갑자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릴 때 무서웠던 기억이 되살아날 정도였다. 뱃전을 심하게 때려대는 그 빗방울에 나의 가슴도 촉촉이 젖어옴을 느꼈다.
출항을 앞두고 이번 항해의 앞날은 순탄치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파고는 높게 일렁일 것이고 남쪽으로부터는 강한 저기압이 발달되어 큰 태풍으로 변할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예정대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특수성을 가진 것이 선박의 운항이다.
‘이번 항해는 수월하지를 않겠구나’
‘기상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자꾸만 마음이 약해져 갔다. 이즈음에 생각이 이르자 나도 모르게 두려움이 나의 뇌리를 엄습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출항을 하면 그 지긋지긋한 계절풍이 불어오는 태평양의 중심부를 지나야 하는데, 기상 조건도 그다지 좋지 않은 데다 내 마음까지 이렇게 약하게 되니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서 있었다.
평소 10여 분이면 그치는 스콜인데 이날은 보통 때와는 달랐다. 30여 분이 지나도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리는 것이었다. 이 비로 인해 마음은 더욱 착잡해지고 있었다. 비를 유달리 좋아하는 나였지만 이날처럼 비가 나의 눈시울을 적셨던 적은 없었다. 불길한 예감에다 별의별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김해공항을 떠나올 때 어눌한 말투로?아빠 가지 마라?하며 울어대던 두 살배기 딸의 모습에다 뒤돌아서서 헤어짐의 아쉬움을 속으로만 삭이다 검색대를 통과하자 생후 3개월 된 아들 녀석을 안은 채로 끝내 울음을 터뜨리던 아내의 얼굴. 때아닌 고향 생각에다 그리운 얼굴들.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정리에 이르기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잡념으로 나의 머릿속에서는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태평양 한가운데를 건너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해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강한 자신감의 상실. 수년간에 걸쳐 쌓아온 해상생활의 경험에 대한 자신감의 무너짐등. 비가 더 거세게 내리면 내릴수록 이 비는 나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었다. 비는 쉽사리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집 생각이 간절히 날 즈음에.
이곳을 떠나면 좋지 않은 날씨에도 태평양 한 가운데서 높은 파도와 싸워야 하고, 그 어느 곳으로도 피할 수 없이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고 강력한 저기압과 맞싸우다가 이 배가 침몰이라도 한다면 나는 그냥 이 세상을 떠나고 수장水葬이 되어야 하는 것을, 어디 한 조각의 유품도 남김없이 홀연히 떠나게 된다면 내 하나의 슬픔으로만 끝나면 되련만 나의 어머니는 내 아들이 이름 모를 이국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죽었노라고 목메이며 얼마나 슬퍼하실까?
내 아내는 두 살 난 딸아이를 업고 생후 3개월 난 아들 녀석을 안고, 내 남편이 이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갔다고 얼마나 울어댈까?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애들은 얼마나 보채며 울어댈까?
아!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는 나의 처지는 딱하기만 하구나.
더욱 심하게 때려대는 빗소리에 섞인 이러한 나의 독백이 소리 높이 울렸을 때 나의 목은 끈끈함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김태식]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온마음재가센터 사회복지사(현)
울산신문 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해양문학상 논픽션 소설 당선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 wavekt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