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절초 피는 들녁
기차 타고 농촌 들녁을 산책하는 농뚜레일 구절초 축제가 정읍시 산내면 옥정호 반에서 10월 4일부터 13일까지 열린다. 깊은 가을 햇빛에 들판은 온통 황금빛 풍요를 누린다. 옥정호는 정읍과 임실을 품어 않은 우리나라 10대 비경의 아름다운 알프스 호반 같은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다. 동쪽으론 섬진강이 발원하여 본류에 합류하고 서쪽으론 동진강으로 흘러 서해로 가는 발원지이다. 이 아름다운 정읍의 산내면에서 가을 전령의 구절초 축제가 열리고 있다.
구절초는 ‘어머니의 사랑’이란 꽃말을 가진 가을 산국이다. 정읍시에선 농촌 들녘과 철도를 연결하는 농뚜레일 산책이란 테마를 가지고 ktx를 타고 호남평야 들녘을 산책하는 축제를 옥정호 구절초 정원에서 열고 있다. 아름다운 가을 여인 같은 구절초는 쑥부쟁이 들국화과의 산국으로 쓸쓸한 산야에 집단으로 서생하는 꽃이다. 꽃잎은 붉은색과 흰색으로 보랏빛 쑥부쟁이 들국화와 구별된다. 보통 20여 개 꽃잎으로 구성된 작은 꽃들이 집단으로 피어 내뿜는 향기와 색조는 과히 가을 여인 같은 자태로 뽑낸다. 음력 구월에 핀다고 하여 구절초라 하고 9마디로 자란다고 구절초다. 그리고 불임녀가 아이를 낳게 하는 약초라서 선모초(仙母草)라고도 한다.
이번 여행엔 비가 많이 와서 습한 탓에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함이 아쉬웠다. 그러나 구절초 군락의 언덕과 푸른 소나무와 높은 하늘, 옥정호 강물이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내어 마치 알프스의 여름 같았다. 아직 피지 못한 구절초가 푸른 솔밭 사이에서 개화의 아름다운 꿈을 꾸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지 않은 푸른 구절초 꽃봉오릴 아쉬워하며 옥정호 동진강 수류를 돌아 칠보면 무성서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무성서원(武城書院)
정읍의 무성서원(武城書院)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나라 9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통일신라 말(886년) 최치원이 태산 군수로 부임하여 8년간 선정을 베푼 관청 자리에 고운 선생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운 데서 유래하였다. 서원은 1615년 건립하여 태산서원이라 했는데 1696년 숙종이 무성서원이란 사액(賜額)을 내렸다. 무성서원은 성균관 교수 없이 지방민이 예(禮)와 악(樂)으로 백성을 교화한 선비문화의 중심으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았고 다른 서원과는 다르게 주민들이 민주적으로 향약(鄕約)를 펴서 서원의 보존과 운영에 참여해 왔다는데 특성을 살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유일한 남았다. 유명한 교수가 없어서 과거급제한 서생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아쉬움이다. 무성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인 고현동향약을 시행하였다.
향교와 서원은 어떻게 다른가? 향교는 성균관에서 운영하는 국립대학이고 향촌은 지방 학교이다, 그러나 서원은 유교 전통과 학문을 익히고 관습을 배우는 사립 보통 학교이다. 국립대학인 향교는 성리학의 근본과 유교 전통 관례를 가르치는 곳이지만 서원은 성리학에 예도를 인정하는 학자가 지방에서 만들어 운영하는 사학이다. 과거시험을 보려면 성균관 교수나 서원장의 허락을 받거나 지방 명문가문의 문벌의 추천을 받아 응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재 등용을 많이 시킨 서원(사림)이 월권 행세를 했다.
고운 최치원에 관한 일화
고운 최치원은 유학자라기보다 도학자(도교)였다. 그는 경주 최씨 중시조이다. 전북 옥구 출생이며 12살 때 당나라로 유학가서 24세 때 당나라 과거에 합격하고 당나라 관리가 되었다. 당시 신라는 지방 토호의 잦은 반란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885년 헌강왕은 국정이 혼탁해지자 당나라 관리인 최치원을 불러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 나이 29세였다. 그는 886년 태산 군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6두품의 고위 관직으로 승급하여 개혁의 기치를 발휘하였다.
당나라의 우호 정책으로 발해와 신라는 당나라의 산둥반도 등주에 신라관과 발해관을 설치하여 양국의 문화를 보급하고 대민 보호와 유학생 파견을 활성화하였다. 발해의 유학생 대거 300여 명이 당나라에 진출하였고 신라는 250여 명의 유학생을 보냈다. 이들은 뛰어난 인재로 성장하였다.
당시 최치원은 신라방에선 뛰어난 재원이었고 발해방에선 대소규가 최고의 재원이었다. 아무튼 대소규와 최치원이 학문적으로 경쟁자였다. 당나라 과거시험에 신라와 발해의 유학생들이 대거 등원하였는데 발해 유학생 대소규가 장원급제를 하였고 2등은 신라의 최승우였고 최치원은 3등으로 합격을 하였다. 그런데 당나라 황제 소종은 장원급제한 발해의 대소규를 저치고 신라의 최승우와 최치원을 특채하였다. 이에 발해에 대인선 왕자가 당나라 소종에게 따졌다.
“신라의 유학생보다 발해의 유학생이 성적도 우수하고 무예도 출중한데 왜 최치원을 우선으로 등용시키는 겁니까?”
“비록 장원은 못 했지만 최치원은 당나라를 추앙하는 최고의 인재이다.”
소종의 말에 최치원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당돌하게 나섰다.
“몰라서 묻나? 신라는 당나라 우방이고 발해는 당이 싫어하는 오랑캐 국이다.”
“최치원, 함부로 까불지 말라. 언젠가는 내가 너를 뭉개버릴 거야.”
대소규가 울분을 토했다. 헌강왕이 사고로 죽고 진성여왕이 계승하면서 최치원이 재상이 되었다. 그는 무너져 가는 신라를 바로 세우려고 온갖 정책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진성여왕의 문란한 성 도취로 나라가 더욱더 위태로워지자 최치원은 직권으로 국가 시무 10조를 발표하여 문란한 국정을 바로잡고자 대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진성여왕은 혼란스러운 반란 정국을 타개할 생각은 안 하고 욕정을 사로잡혀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중앙 관료를 한 명씩 침실로 불러들여 성도략을 즐겼다. 관료의 부정과 부패로 신라는 점점 패국의 길로 걷고 있었다. 최치원이 충언하였다.
“전하, 국기를 문란케 하는 호색 행위를 금하십시오.”
“대체 그게 재상이 임금에게 할 소린가?”
“임금의 불륜으로 나라가 망할 지경입니다.”
“절 싫으면 중이 떠나는 거요. 당장 관직을 그만두시오.”
임금과 최치원의 대립은 극한 상태였다. 여왕은 최치원을 해임시켰다. 국난극복을 위해 최치원은 자객을 심어 진성여왕을 살해하고 태백 회를 열어 효공왕을 내세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효공왕이 후사가 없이 반란군으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태백 회의는 다시 효공왕이 후사가 없자 박씨를 왕위로 옹립했다. 53대 신덕왕이다. 이를 본 발해의 대소규 재상이 대인석 왕을 설득하였다.
“신라가 내분으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참에 쳐서 부숴버립시다.”
“신라와 전면전은 안 됩니다.”
대소규는 대현석 왕의 뜻을 거역하고 군사를 집결하여 국경을 넘었다. ‘최치원, 난 네놈을 잡을 거야.’ 국경 충돌이 일어나자 신덕왕은 발해의 남침이 두려워서 백선일 장군과 최치원 별감을 사신으로 보냈다. 국경인 단항포에서 발해의 대소규 재상과 신라의 최치원이 협상장에 마주 앉았다. 최치원이 제안하였다.
“남침은 무모한 짓이로다. 차라리 남북이 통일하자.”
“내가 신라를 복속시켜 통일할 것이다.” 대소규의 야심은 당당했다.
그런데 발해는 거란의 침입으로 망했고 신라는 후삼국의 등장으로 망해서 남북국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김명관(金命寬)의 고택
정읍시 산외면에 99간 국가민속문화재 26호 김명관 고택이 있다. 1784년(정조 8년)에 지은 민간 고택으로 건축학적 미학을 갖추었다. 동진강 상류의 배산임수가 완벽한 풍수지리를 갖춘 명당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 · 사랑채 · 안행랑채 · 안채· 별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행량채는 ㄷ자형으로 안행량채, 바깥행랑채(머슴기거) 사랑채는 사랑방과. 침방이 (심부름 아이방) 사랑방 사이에는 들어열개창호가 있다.
안채는 ㄷ자형의 안방(노부인), 맞은편 건넌방(며느리방). 손부를 보면 며느리가 손부에게 건넌방을 물리고 안방에서 노부인과 같이 생활한다. 별당은 안채의 서쪽에 일꾼들이 기거하던 곳. 찾아온 안손님이나 딸들이 거처한다. 서당채는 외거노비의 집이다. 99간의 고택의 후원(後園)은 아낙들의 가례 교육장이며 놀이마당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정읍 산내 달 고운 사교마을
정읍시 산내면 사교마을은 옥정호와 노령산맥이 동으로 성주산, 서쪽으로 감투산, 남쪽으로 회문산, 북쪽으로 종석산이 둘러싸인 산내촌이다. 4개의 산세가 놋쇠 밥그릇처럼 둘러싸여 달빛이 고운 두메산골 청정 마을을 안고 있었다. 이곳 달빛 고운 사교 선비마을에서 사라지는 전통문화와 산촌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외부와 단절된 마을이 마치 이방인이 사는 고립 전원 같았다. 이곳에 폐교를 이용한 농촌체험 선비촌이 형성되어 전통 식생 문화와 농촌문화 체험과 명상과 음악은 유익한 정서 순화의 힐링이었다.
불우헌 정극인의 상춘곡
‘속세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가? 옛사람의 풍류 있는 생활을 내가 따를까, 못 따를까. 세상 남자로 태어난 몸으로 나와 같은 사람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사는 자연의 지극한 즐거움을 모른단 말이냐? 초가삼간을 맑은 시냇가 앞에 지어 놓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한 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주인이 되어 있도다.’
속세를 떠나 자연에 몰입하여 봄을 찬양하며 인생을 즐기는 낙천적인 노래다. 총 79수이며 3·4조, 4·4조, 2·3조가 주조를 이룬다.
정극인이 1437년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성균관 태학생(太學生)을 앞세워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로 함경도로 귀양을 갔다. 풀려나 처가인 태인에 집을 짓고 이름을 불우헌이라 하였다. 불우헌 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며 향리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는 한편으로 향약(鄕約)계축(契軸)을 만들어 향리의 교화에 힘썼다.
[참고]
태안 고현동약(古縣洞約) : 항약이란 향촌의 자치 규정이다. 불우헌(不憂軒)이 태인현 고현동에 살면서 현지 주민의 도의선양(道義宣揚)과 상호친목, 권선징악의 미풍양속을 권장, 교도하려는 목적으로 향음례(鄕飮禮)를 1475년(성종)에 작성한 향약 문헌들이다. 1510년 예조좌랑 송세림이 발문을 지었다. 정읍 농뚜레일 산책기행은 기차를 타고 호남 벌을 누비며 구절초 피는 농촌에서 농무와 선비정신을 익히는 보람된 여행이었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