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 장수로서 활동한 인물들의 이름은 역사 서적이나 영화 또는 TV드라마 등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아마 임진왜란사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그러한 인물들 가운데 이운룡(李雲龍)에 관해서도 아시는 분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이운룡의 자는 경현(景見), 호는 동계(東溪), 본관은 재령(載寧), 거주지는 청도(淸道), 생몰년은 1562년~1610년이다. 그의 신상과 행적은 1584년에 열린 문무과별시의 과거급제자 명단인 「만력12년갑신추별시문무방목」, 손기양(孫起陽, 1559~1617)의 『오한집』에 실린 이운룡의 묘지명(墓誌銘), 이식(李植, 1584~1647)의 『택당집』에 실린 이운룡의 묘비명(墓碑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방목과 『오한집』은 당대의 기록으로서 이운룡의 신상과 행적에 관한 이들 기록의 신빙성은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다.
단, 그의 생년은 방목에는 계해년(1563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오한집』과 『택당집』에는 임술년(1562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이 서로 다르다. 『오한집』과 『택당집』의 기록이 생년뿐만 아니라 태어난 월일까지 자세히 서술한 점으로 보아 『오한집』과 『택당집』에 기록된 생년이 옳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운룡의 임진왜란 시기 행적이 나타나는 가장 빠른 기록은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인 「옥포파왜병장」(1592년 5월 10일)으로서 이 기록에는 그의 관직이 옥포만호로 나타난다. 이순신의 또 다른 장계인 「당포파왜병장」(1592년 6월 14일), 「견내량파왜병장」(1592년 7월 15일), 「부산파왜병장」(1592년 9월 17일)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지만, 손기양의 『오한집』은 그가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등에도 참전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손기양의 『오한집』은 이운룡이 1593년 4월에 웅천현감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는데, 『난중일기』의 1594년 기록에도 이운룡의 관직이 웅천현감으로 나타난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4년 7월 3일
맑았다. 충청수사(이순신-李純信), 순천부사(권준)이 활을 쏘았다. 웅천현감 이운룡이 휴가를 신청하고 미조항으로 돌아갔다.
[원문] 初三日己卯 晴 忠淸水使順天射帿 熊川縣監李雲龍告由 歸于彌助項
이운룡은 1596년에 다시 경상좌수사로 제수된다. 그의 경상좌수사 부임 사실은 『선조실록』의 기사(74권, 선조29년-1596년 4월 11일 정미 2번째 기사)와 『난중일기』의 기록(1596년 2월 17일) 등 여러 자료에 나타나 있다. 이운룡은 상당히 오랜 기간 경상좌수사를 지낸 뒤 1605년에 이르러서는 경상우수사 겸 통제사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남병사와 충청수사 등의 관직을 거쳤다.
『난중일기』의 1596년 기록에는 이운룡과 손인갑(孫仁甲, 1542~1592)이 친분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있어서 눈길을 끈다. 손인갑은 임진왜란 시기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인홍(鄭仁弘, 1536~ 1623) 휘하로 합류한 뒤 무계전투(茂溪戰鬪), 마진전투(馬津戰鬪) 등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장수이다. 그는 마진전투 이후 남은 적을 섬멸하기 위해 낙동강으로 들어가 추격하다가 모래 구덩이에 빠져 타고 있던 말과 함께 전사하였다. 손인갑의 자는 선백(善伯), 호는 후지당(後知堂), 본관은 밀양(密陽), 거주지는 창녕(昌寧)이다. 다음은 『난중일기』에 나타난 이운룡과 손인갑 관련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6년 2월 5일
늦게 삼도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음식을 대접하며 위로하고 아울러 활을 쏘고 음악을 들으면서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웅천현감(이운룡)이 손인갑의 유물을 가져왔기에 여러 장수들과 가야금 몇 곡을 들었다.
[원문] 晩 招集三道諸將 餉勞兼射帿 作樂醉罷 熊川進孫仁甲舊物 故与諸將聽伽耶琴數曲
위 『난중일기』에 언급된 유물(舊物)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이운룡이 손인갑의 유물을 가져온 사실을 통해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친분 관계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운룡의 고향 청도(지금의 경북 청도군)는 손인갑의 고향 창녕(지금의 경북 창녕군)과 서로 지역의 경계가 맞닿아 있을 정도로 가깝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현재 경남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에는 손인갑과 그의 아들 손약해(孫若海, 1565~1592) 부자(父子)를 기리는 경남 문화재자료 제656호 의령 쌍절각(宜寧 雙節閣)이 있는데, 흥미롭게도 바로 옆 지역인 지정면 오천리에는 이운룡의 묘소와 이운룡의 위패를 모신 경북 문화재자료 제305호 기강서원(岐江書院)이 있다. 쌍절각은 본래 1609년 손인갑 후손들의 거주지였던 의령군 봉수면 신현리에 지어졌으나, 1943년에 임진왜란 전적지였던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또한 이운룡의 묘소는 원래 경북 청도군 법귀산에 안장되었던 것을 인조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의령 쌍절각과 기강서원이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을 보면, 이운룡과 손인갑이 그들 사후에도 서로 인연이 닿은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필자의 능력이 부족하여 두 사람이 생전에 어떤 친분 관계가 있었는지를 명확히 밝히지 못한 점이 무척 아쉽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만력12년갑신추별시문무방목(萬曆十二年甲申秋別試文武榜目)」
한국고전종합DB, 손기양(孫起陽)의 『오한집(聱漢集)』 권3 「비지(碑誌)」
한국고전종합DB, 이식(李植)의 『택당집(澤堂集)』 권10 「비명(碑銘)」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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