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자락 백제 사찰 신원사로 가는 길가에 늘어선 감나무에는 주황빛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가을 감성을 물씬 풍긴다. 산사로 가는 길은 계룡산에서도 무속의 기운이 가장 센 곳이라 곳곳에 작은 암자와 굿당이 지천으로 늘려있다.
계룡산은 민족의 명산이며 신령스러운 산이다.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려고 답사를 왔을 때 동행했던 무학대사가 금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이고 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라고 한데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길지(吉地) 계룡산의 동쪽에는 동학사가, 서쪽에는 갑사, 남쪽에는 신원사가, 북쪽에는 구룡사가 있었는데 북쪽의 구룡사는 폐사되고 지금은 3대 사찰만 남았다.
신원사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에 도착해서 천왕문을 지나 절집으로 들어선다. 햇빛 좋은 이런 날은 산사의 청솔 그늘 길을 걷는 것만도 그저 고마울 뿐이다. 대웅전으로 가는데 근처 약수터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 계룡산 방향을 주시하고 있다. 계룡산 천왕봉에서 연천봉 사이의 능선이 와불(臥佛)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모두 신기한 표정이다.
계룡산의 주봉인 천황봉을 배경으로, 천황봉과 연천봉 사이를 흐르는 계곡 옆의 최승지(最勝地)에 자리한 신원사는 651년(백제 의자왕 11) 열반종의 개산조 보덕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본래 이름은 신정사(神定寺)였으나 뒤에 신원사(神院寺)라고 했다가 1866년(고종 3)에 지금의 신원사(新元寺)로 고쳤다고 한다.
대웅전 마당에 들어서니 먼지 하나 없는 것처럼 정갈하다. 호젓하고도 스산한 아름다움이 밀려온다. 마음을 다하는 섬세한 손길이 절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일 거다. 그래서 소란스런 마음도 절집에 들어서면 잔잔해지고 고요해진다. 천년고찰에 걸맞지 않게 대웅전이 지나치게 소박해서 잠시 놀란다. 옷깃을 여미고 대웅전에 계신 부처님께 삼배를 올린다. 신원사의 긴 역사 동안 이곳에 얼마나 많은 스님과 불자들이 머물다 갔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대웅전을 나서는데 염불 소리 대신 낭낭하고 향기로운 스님 설법 소리에 끌려 걸음이 절로 따라간다. 근처 영원전에서 불교대학 수강생들에게 강의하는 스님의 차분하고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가 마치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는 우화(雨花)를 생각나게 한다. 스님들 언설(言說)은 때로 시원한 단비다. 부단히 깨어 있어야 할 까닭을 말하는 그들의 음성에 솔깃한 내 귀는 행복한 귀다.
신원사에는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중악단(中嶽壇)이 자리 잡고 있다. 절 안에 있지만 절과는 사뭇 다른 건물구조를 지녔다. 마치 궁궐의 축소판이다. 구릉지의 동북과 서남을 축으로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신원사 동쪽에 위치한 중악단은 조선 태조 3년에 창건된 것으로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던 산신각이다. 왕실의 기도처로 내려오다가 폐사된 것을 고종 때 명성황후의 서원으로 재건되어 현재까지 내려온다고 한다. 그래서 해마다 명성황후를 추모하는 천도재를 지낸다. 건물은 지난 세월만큼 고색창연하고 아름다웠지만 처연함이 담겨 있다.
신원사에서 나와 고왕암으로 가는 고즈넉한 산길은 돌돌돌 계곡 물소리를 담은 솔바람을 쐬면서 걷는 길이다. 청솔 그늘 아래 평탄한 산길이라 가슴에는 솔 내음도 켜켜이 잰다. 연천봉으로 오르는 고즈넉한 산길을 느릿느릿 걸으며 길가에 핀 가을꽃도 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암자의 풍경 소리를 듣는다. 이곳이 불계(佛界)인지라 느려지던 세상의 시간과 속도는 깊은 산중인 이곳에서는 더 느려진다. 아니 여유로워지면서 다른 속도로 내달리던 몸과 마음이 비로소 하나 됨을 느낀다.
한창 증축 공사 중인 금룡암을 지나서 신작로를 버리고 산길로 접어든다.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몇 구비의 고갯길을 지나자 큰 절벽 아래 다소곳이 들어선 작은 암자 고왕암이 나온다. 찾아오는 이도 없는 깊은 산중의 작은 절집은 텅 빈 듯 고요하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명으로 등운스님이 창건한 사찰인 고왕암에는 패망한 백제의 슬픈 생채기가 담겨 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자 의자왕의 왕자인 부여융(扶餘隆)이 6년 동안 경내 융피굴(隆避窟)에 피신해 있다가 잡혀갔다고 해서 사찰 이름을 고왕암(古王庵)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곳에서 산새들과 도반이 되어 자연과 함께 생활하시는 견진(見眞)스님으로부터 백제왕들의 위패가 봉안되어있는 경내의 백왕전(百王殿)에서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부터 마지막 의자왕까지 31명의 역대 왕들의 넋을 위로하는 ′백제 31대왕 추모문화대제′가 매년 10월에 봉행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심산유곡의 작은 암자에서 패망한 백제의 선대왕을 기리는 추모제가 매년 열린다는 소식에 작은 울림이 큰 파동이 되어 가슴으로 다가온다.
고왕암은 맑고 고즈넉하다. 절의 크기를 절의 규모로 가늠함은 어리석은 일이다. 전각이 산을 덮고, 불탑이 하늘을 찌르면 부처가 가까운가. 아닐 것이다. 부처는 천년의 바람이 지워버린 폐허 위에도 있다. 마음이 청산이라면 거기가 법당이고 무문관이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이도 없는 깊은 산중의 작은 절집은 텅 빈 듯 고요하다. 온몸으로 느끼는 산문의 고요, 그 자체가 풍경의 절정이다. 잠시 뒤 백왕전 뒤쪽 절벽 위에 우뚝 선 거송(巨松)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마치 번뇌로부터 일깨우는 목탁소리같다. 고왕암을 내려서는데 오늘따라 솔 향기가 유난히 코끝을 스치고 산색마저 스산하여 처연함이 더한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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