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시기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활동한 인물들 가운데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이라는 인물이 있다. 우후(虞候)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를 보좌하는 부직(副職)으로서 충청우후는 충청수사를 보좌하는 관직이다. 『난중일기』에는 '충청우후'라는 관직이 1594년 일기부터 언급되지만, 원유남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1596년 일기부터이다. 아마도 1596년 이전에는 다른 사람이 충청우후로 있다가, 1596년 즈음부터 원유남이 충청우후가 된 듯하다.
원유남의 자는 관부(寬夫),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원주(原州), 생몰년은 1561~1631년이다. 다음은 원유남의 이름이 나오는 『난중일기』의 기록 가운데 하나이다.
『난중일기』, 1596년 5월 22일
충청우후 원유남, 좌우후(전라좌우후) 이몽구, 홍주판관 박윤 등과 활을 쏘았다. 홍우가 장계를 가지고 감사에게 갔다.
[원문] 与忠淸虞候元裕男左虞候李夢龜洪州朴崙等 射帿. 洪祐持狀啓 徃于監司.
1596년 『난중일기』에는 충청우후 원유남의 관직이나 이름이 40차례 가까이 언급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이순신과 원유남의 친분이 평범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두 사람은 1588년에 있었던 여진족 시전부락 토벌 때 함께 전투에 참전한 적이 있다. 이일(李鎰, 1538~1601)이 1588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서 경흥 부근의 여진족 시전부락을 소탕한 일을 그린 그림인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에는 당시 전투에 참전한 장수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에는 이순신의 이름과 함께 원유남의 이름도 나와 있다. 신초(辛礎, 1549 - 1618)의 문집인 『문암선생충의록』에도 「선묘기축특사제전장화상열록」이라는 제목으로 위 전투에 참전한 장수들의 명단이 똑같이 실려 있는데, 신초 또한 위 전투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1597년 『난중일기』에는 원유남의 이름이 딱 한 차례만 언급되어 있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두 사람이 흉금을 터놓고 대화하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7년 5월 5일
늦게 충청우후 원유남이 한산도로부터 와서 원공(원균)의 흉하고 패악한 (일을) 많이 전했고 또한 “진중의 장수와 군사들이 이반하여 형세를 장차 예측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원문] 晩 忠淸虞候元裕男至自閑山 多傳元公之兇悖 又道陣中將卒之離叛 勢將不測云云.
1596년 『난중일기』에는 원유남의 아버지의 제사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6년 6월 17일
충청(우후 원유남)이 자기 아버지의 제사 때문에 거망포로 돌아갔다.
[원문] 忠淸以其父忌 告歸巨網浦.
원유남의 아버지는 임진왜란 초기 강원도 조방장으로 활약했던 원호(元豪)로서, 자는 중영(仲英), 시호는 충장(忠壯), 본관은 원주(原州), 생몰년은 1533년~1592년이다. 흥미로운 점은 원호가 자기 아들 원유남과 마찬가지로 1588년 여진족 시전부락 토벌 전투에 참전했다는 사실이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와 「선묘기축특사제전장화상열록」에 실린 참전 장수 명단에서 원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김육(金堉, 1580~1658)의 문집인 『잠곡유고』에 수록된 원호의 「시장(諡狀)」에 따르면, 니탕개의 난 즈음에 조정이 수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새로 무과에 급제한 인원들을 북방에 배치할 때 원호의 아들 원유남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즉, 원호와 원유남 부자가 함께 전투에 참전하는 특이한 일이 벌이진 것이다.
원호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 향병을 모아 여주(驪州) 일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이후 금화(金化)에서 적의 복병을 맞아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원호의 이러한 행적은 『선조실록』의 기사(26권, 선조25년-1592년 5월22일 신사 3번째 기사/26권, 선조25년-1592년 5월26일 을유 2번째 기사)와 『선조수정실록』의 기사(26권, 선조25년-1592년 6월1일 기축 35번째 기사)에 기록되어 있다.
원호 장군 임진 승전비 - 자료출처: 여주시 홈페이지
원호의 「시장」과 그의 족보인 『원주원씨음성공파세보』에 따르면 그가 전사한 날짜는 6월 19일이다. 위 『난중일기』의 1596년 6월 17일 기록에 원유남이 아버지 제사 때문에 돌아갔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원호의 제삿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원호의 족보에 따르면 원호는 원주원씨 시중공계(侍中公系) 음성공파 파조 원효이(元孝而)의 고손자이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김육(金堉)의 『잠곡유고(潛谷遺稿)』 권11 「시장(諡狀)」
남명학고문헌시스템, 신초(辛礎)의 『문암선생충의록(聞巖先生忠義錄)』 권1
「선묘기축특사제전장화상열록(宣廟己丑特賜諸戰將畵像列錄)」
이재호,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연구」, 2013,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원주원씨음성공파세보(原州元氏陰城公派世譜)』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