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회 코스미안상 은상 당선소감]
봉제공장에서 40년 가까이 재봉틀을 돌리며 살아온 제 인생에서 글은 버팀목이었습니다. 글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습니다. 저의 글을 눈여겨 봐주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물어 가는 가을날! 감나무에 주렁주렁 감이 익어가듯 이순의 나이이지만 글로 표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합니다. 재봉틀을 돌리며 노루발이 가는 길을 따라 사는 인생이지만 글을 통해 환히 피는 그런 삶이었으면 합니다.
수많은 글 중에 저의 글을 뽑아주심에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늘 행운이 깃들기를 빕니다.
사향 노루발의 따뜻함
-재봉틀을 돌리며
이른 아침부터 노루가 뛰었다. 아이들의 아침밥을 대충 챙겨놓고 아이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재봉틀에 앉아 발판을 굴렸다. 그래야만 가난을 빨리 물리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한 장이라도 더 많이 박아야 하는 욕심으로 단칸방에서 노루를 뛰게 하였다. 노루의 발자국이 늘어날수록 기울어진 살림살이 수평이 되리라 믿으면서 노루의 꽁무니를 재촉했다.
드라이버로 노루의 발을 따고 톱니의 주변에 쌓인 먼지를 핀셋으로 끄집어 내면 노루의 발길이 가벼워진다. 노루의 발길이 가벼워져야 발자국을 따라가는 내 손길도 즐거워진다. 내 손길이 즐거워야 하루가 평화로워진다. 이것이 노루를 잘 다루는 내 방법이다. 햇빛 한 장 들어오지 않는 단칸방을 벗어나려면 노루를 빨리 뛰게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노루가 퍼뜩!퍼득! 잘 뛸수록 통장에 동그라미가 하나씩 늘어나기에 날이면 날마다 노루를 재촉했다.
창밖에는 꽃이 피었다고 봄이 왔다고 야단이지만 톱니의 언덕을 지나가는 노루는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하며 세상 밖을 쳐다볼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꽃이 피어 나든지, 남들이야 꽃구경을 가든지 실을 잘 잡아당겨야 바느질을 잘할 수 있다는 것만 아는 노루는 열심히 뛰기만 했다.
엄마는 맨날 일하면서 돈이 없다고 해, 진주네는 짜장면 먹는다고 했단 말이여!
아들아이가 밖에서 놀다 방으로 들어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집에 돈이 없을 때는 십 원짜리 한 푼도 없을 때가 있다. 엉엉 우는 아들아이를 달래기 위해 맨발로 구멍가게에 가서 외상장부에 내 이름을 쓰고 짜짜로니를 샀다. 아버지가 빚을 지고 갚지 못해 읊어대던 치부책처럼 외상장부를 나도 쓰고 말았다. 그러나 난 그 외상장부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냄비에 짜짜로니를 끓였다. 겁나게 맛이 있다고 엄지척을 해 주는 아들이 사랑스러웠다. 언제나 어둠만 지키던 단칸방에 해 맑게 웃는 아들아이가 있고 나와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재봉틀이 있었다. 재봉틀을 열심히 돌리면 단칸방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리라, 믿음도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대신 봉제공장에 발을 들였다. 교과서와 연필 대신 원단과 쵸크를 잡았다. 원단이 안쪽인지 바깥쪽인지 구분을 하지 못했다. 안쪽에다 쵸크로 무늬를 그려야 하는데 가끔은 바깥쪽에다 그려서 재봉틀로 박으면 불량이 되었다. 그런 날이면 미싱사에게 욕을 퍼지도록 얻어먹었다.
이것 잘못 박아서 뜯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줄 아느냐? 눈이 삐었냐? 서러워서 울다 지치는 밤이면 고향의 고사리밭이 가고 싶고 미나리밭에 앉은 나비가 보고 싶었다. 미나리밭에 나비가 보고 싶어 흐르는 시냇가에 발을 담그고 다슬기를 잡고 있노라면 야! 너 지금 뭐하니? 네가 주머니를 잘 그려야, 내가 생산량을 많이 박아야 퇴근한다고? 정신이 차리라고?
앙칼진 목소리가 객지에 나 앉은 나를 더 슬프게 했다. 볍씨를 노풍이란 신품종을 뿌려 모내기하던 아버지는 그해 흉년을 맞아 일 년 농사를 망쳐 버렸다. 내가 무엇 때문에 빚을 지고 빚빚 하느냐고 따질 때 아버지가 설명해 주어서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우리 가족이 먹는 양식은 양식이 아니라 빚을 먹었다. 한 해 두 해 갚지 못하자 이자에 이자가 붙어서 아버지는 빚에 시달렸다.
쵸크 자국으로 그림을 그리는 값으로 아버지의 빚을 갚아갔다. 쵸크 잡던 시간이 흐르자 바늘을 잡게 되었다. 남의 집은 황소 한 마리씩 있는데 아버지만 송아지 한 마리도 없다고 노래를 불러 싸서 송아지 두 마리도 사 드렸다. 쵸크를 잡았던 날보다 바늘을 잡게 되니 세상살이가 부드러워졌다. 딱딱한 바늘 끝에서 부드러움이 있다는 것을 바늘을 잡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비를 흠뻑 맞고 방안으로 들어 온 아들아이는 “친구들은 엄마들이 우산 갖고 마중 나왔는데 나만 엄마가 없었어요” 하고 엉엉 우는 아들아이를 미안하다고 안아 주었다. 집에 왔는데 엄마가 없는 아이는 어떨까? 하고 물으니 그것은 더 슬픈 일이라고 아이는 대답했다. 아들을 낳아놓고 미역국을 먹으려고 한 수저 입에 넣었는데 목울대에서 멈추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것이 흐르고 있었다 “엄마” 소리가 내 입에서 났다. 내 몸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흔들리며 솟구쳤다. 열두 살 때 산골짜기 살기 싫다고 집을 나갔는데 영영 오지 않았다. 엄마가 없다는 것은 그늘이 없다는 것이다. 내 아이에게 그늘이 없이 자라게 하기 싫어 힘들더라도 재봉틀이라도 붙잡고 아이의 그늘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왔을지라도 엄마가 집에 있으니 좋지 않으냐고 물으니 아들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아이는 안방에서 숙제하고 나는 뒤 곁에서 재봉틀을 돌렸다. 조선시대에 한석봉 엄마는 떡을 썰었다지만 이 시대의 아들의 엄마는 재봉틀을 돌리는 것이리라. 나 스스로 위로를 하며 재봉틀을 돌리는데 아들아이가 내 옆으로 오더니 물이라도 마시면서 하라고 물컵을 내 입에 대어 주었다. 고사리 같은 아들아이의 손이 어찌나 이쁘던지 아들의 손에 내 입을 갖다 대었다. 이렇게 이쁜 자식을 놓고 내 엄마는 어떻게 발길을 돌렸을까? 빗속을 걸어 집으로 오기까지 마중 나오지 않는 엄마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아들의 차가운 마음이 서서히 녹아드는 듯했다.
엄마! 마이너스 플러스가 뭐예요? 친구들은 학원 다녀서 잘 아는데 나만 몰랐어요. 그랬어, 엄마가 알려줄게, 사람이 살면서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일을 하면 나에게 플러스가 되는 것이고 나쁜 행동 하고 나쁜 말 하면 나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여! 연립방정식 푸는 것을 몰라서 물어보는 거지? 엄마가 알려줄게. 모르는 것 있으면 물어보렴. 엄마가 이렇게 엎드려 재봉틀 돌려받은 월급으로 학원비 주는 것은 솔직히 아까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 눈동자 놓치지 말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면 플러스인거야.
엄마는 날마다 일만 하느냐고 하던 아들은 물앵두처럼 자라 사회로 나갔다. 연립방정식을 몰라 울먹이던 아들은 지금 그 생의 방정식을 잘 풀어나가고 있으리라. 직장 생활하면서 마이너스가 무엇인지 플러스가 무엇인지 잘 터득해 나가리라 믿는다. 직장 동료들에게 좋은 말 하고 좋은 태도로 공손하게 겸손하게 생활해 나가는 플러스 인생을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좋은 사람보다는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는 아들이 되기를 바라는 어미 마음이다. 단칸방에서 전세방으로 전세방에서 우리 집이 되기까지 노루발의 따뜻한 발걸음이 담겨있다. 노루발의 뜨거움과 내가 밟아대는 욕심의 발걸음이 맞물려서 돌아가는 리듬이 있었으므로,,,
이순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도 마음만은 넉넉하다. 바늘 끝의 아픔은 내 가난의 도구였으므로 날마다 노루발을 따라나선 것이었다. 노루발을 따라나선 길이 이제는 향기롭다. 무던하게 버틴 청춘은 날아가 버렸지만 나는 노루발이라도 잡고 비빌 언덕을 찾았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노루발과 반평생을 살았으니 서로 리듬을 맞춰 뜨겁게 춤추며 꽃길을 걸어보고 싶음이다. 고향에서 빚빚하던 아버지를 대신하고 아들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보듬어준 노루발! 그 따뜻함 덕분에 오늘이 더욱 사랑스럽다. 그 이름을 사향이라 불러주고 싶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