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산 칼럼] 묘비명(墓碑銘), 마지막 약속

가재산

한 사람의 인생을 한 줄의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산 자들이 죽은 자에게 주는 인생 성적표 같은 묘비명(墓碑銘)에는 인생철학과 삶의 흔적이 응축돼 있다. 묘비명은 어쩌면 성불을 한 스님이 마지막 화장할 때 남기는 사리처럼 삶을 응축해 놓은 결정체, 나 자신과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묘비명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내부 벽화나 무덤 안의 글귀들도 넓은 의미에서 묘비명이라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저명인사들의 묘비명이 점차 길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현대에 와서는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문구들이 선호된다. 

 

묘비명의 세계는 다양하다. 묘비명은 개인의 삶을 요약하고 정의하는 도구다. 묘비명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영감과 교훈을 준다. 어떤 이는 죽어서도 사람들을 웃기려 하고, 또 다른 이들은 깊은 철학적 사유를 남기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삶의 교훈을 전하려 한다. 이처럼 다채로운 묘비명의 세계로 한번 여행을 떠나보자. 

 

먼저 '해학적 묘비명'을 만나보자. 이들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들 수 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한 문장으로 그는 자신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정리하면서도 우리에게 살아있는 동안 주저하지 말고 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괴짜 걸레스님으로 유명한 중광스님의 "에이, 괜히 왔다 간다."라는 묘비명 또한 인생의 허무함을 담백하게 표현하면서도 미소를 짓게 만든다.

 

이런 해학적 묘비명들은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만들어준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삶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조언한다. 삶이 힘들 때 이들의 묘비명을 떠올리며 한번 웃어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그들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철학적 묘비명'은 어떤가? 이들은 죽어서도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천상병 시인의 묘비명이 그 대표적인 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짧은 문장 속에는 깊은 철학이 담겨 있다. 그는 우리의 인생을 '세상 소풍'으로 정의하며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으라고 말한다.

 

니체의 묘비명 또한 그의 철학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제 나는 명령한다. 차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발견할 것을." 우리에게 맹목적인 추종보다는 자아의 발견과 초월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들의 묘비명을 읽고 있자면 무덤 앞에서 갑자기 철학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에게 깊이 있는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세 번째로 '교훈적 묘비명'의 예를 들어보자. 이들은 죽어서도 뭔가를 알려주고 싶거나 가르치려 한다. 정주영 회장의 "이봐 해봤어"라는 묘비명은 그의 불굴의 의지와 도전 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격호 회장의 '거기 가봤나?'라는 묘비명도 같은 맥락으로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먼저 저질러볼 것을 권유하는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시인 조병화의 묘비명 또한 깊은 울림을 준다.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어머님의 심부름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이 문장은 삶의 의미와 사명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 각자가 이 세상에 온 이유와 해야 할 일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의 묘비명을 읽고 있자면 무덤 앞에서 갑자기 인생 수업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다양한 묘비명들을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묘비명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떤 묘비명을 남길 것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죽음 후의 일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살아있는 지금의 삶을 되돌아보고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갈 것인지 성찰하는 기회가 된다.

 

이러한 묘비명에 대한 고민은 고대 로마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이 라틴어 문구는 승리에 도취한 장군들에게 삶의 유한함을 상기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단순히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더욱 충실히 살라는 역설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즉 웰다잉(Well-dying)은 웰빙(Well-being)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이치이기도 하다.

 

우리가 남기고 싶은 묘비명은 곧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유산이자 삶의 요약본이다. 묘비명은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걱정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묘비명을 생각하는 것은 삶을 의미 있고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우리가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 알면 그에 걸맞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해학적인 묘비명들처럼 삶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묘비명을 통해 우리가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묘비명은 결국 우리가 선택한 삶의 결과물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나는 내 묘비명을 건강할 때 수년 내에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묘비명은 '메멘토 모리'의 정신과 내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담고자 한다. 묘비명에 담고자 하는 가치를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언젠가 내 묘비 앞에 서는 사람들에게 작은 영감이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내 묘비명을 써 내려가는 심정으로 삶을 살아가려 한다. 묘비명은 나를 아는 세상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당부이자, 나 자신에 대한 마지막 약속이기도 하다.

 

 

[가재산]

한류경영연구원 원장

한국디지털문인협회 부회장

미얀마 빛과 나눔 장학협회 회장

저서 : 『한국형 팀제』, 『삼성이 강한 진짜 이유』

『10년 후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 『아름다운 뒤태』

이메일 jska032852@gmail.com

 

작성 2024.10.31 09:46 수정 2024.10.3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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