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의 명재상을 꼽으라면,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이원익(李元翼)이다. 그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功勵), 호는 오리(梧里), 생몰년은 1547~1634년이며, 태종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인 익녕군(益寧君)의 후손이다. 이원익이 청렴한 관리이고 또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지향했던 사실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대동법의 초기 모델인 경기선혜법과 삼도대동법이 그의 힘으로 이루어진 사실이다.
오리 이원익은 충무공 이순신과 깊은 친분 관계를 맺었다. 아마 임진왜란이 아니었다면 이 두 사람은 서로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다음은 『난중일기』에 나타난 이원익과 이순신의 만남에 대한 기록이다. 아마 이때가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던 듯하다.
『난중일기』, 1595년 8월 23일
체찰사(이원익)에게 가니 조용히 이야기하는 말 가운데 백성을 위하여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뜻이 많았다.
[원문] 徃體察䖏 則從容言語間 多有爲民除疾之意
당시 우의정 이원익은 도체찰사를 겸하여 서울을 떠나 남쪽 지방으로 내려왔다. 이 시기 이원익은 군사 업무를 협의할 일로 이순신에게 군관을 보내어 진주성에서 만나자고 하였는데, 위 『난중일기』에 기록된 만남이 그것이다. 그런데 위 『난중일기』의 내용에는 군사 업무보다는 이원익이 애민사상이 언급되어 흥미롭다. 이원익이 가진 평소 생각이 이순신의 일기를 통해서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다.

도체찰사 이원익은 통제사 이순신을 만난 뒤 한산도를 방문하였다. 다음은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5년 8월 27일
군사 5,480명에게 음식을 먹였다. 저녁에 상봉(한산도 망산)으로 가서 적진과 적이 (다니는) 길을 가리켜 보였다.
[원문] 軍士饋飯五千四百八十名 夕到上峯 指㸃賊陣及賊路
위 『난중일기』의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원익의 문집인 『오리집』에 따르면 당시 이순신은 이원익에게 건의하여 조정의 정승이었던 이원익이 한산도의 군사들에게 성찬을 베푸는 것으로 꾸몄다고 한다. 이는 이원익과 이순신 두 사람의 현명한 일처리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방송이나 인터넷 매체를 통해 소개되기도 한 꽤 유명한 이야기이다.
1596년에 이르러 이원익과 이순신의 업무 관계는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다. 『난중일기』의 1596년 일기에는 체찰사 이원익에 대한 언급이 60여 차례나 나온다. 다음은 그러한 기록 가운데 하나이다.
『난중일기』, 1596년 윤8월 19일
출발하여 녹도로 가는 길에 도양 둔전을 살펴보았는데 체찰사(이원익)가 기뻐하는 기색이 많았다. 도착하여 숙박하였다.
[원문] 發鹿島路 審見道陽屯田 体相多有喜色 到宿
* 녹도: 지금의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고흥쌍충사 일대
비록 위 『난중일기』의 기록은 단편적인 사례이지만, 이를 통해 이원익이 이순신의 일 처리에 대해 매우 만족했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원익이 이순신의 인물됨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선조실록』의 기사에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선조실록』 권82, 선조29년(1596년) 11월 7일 기해 3번째 기사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스스로 변명하는 말이 별로 없었으나, 원균은 기색이 늘 발끈하였습니다. 예전의 장수 중에도 공을 다툰 자는 있었으나, 원균의 일은 심하였습니다. 소신이 올라온 뒤에 들으니, 원균이 이순신에 대하여 분한 말을 매우 많이 하였다 합니다. 이순신은 결코 한산도에서 옮길 수 없으니 옮기면 일마다 다 글러질 것입니다. <<후략>>"
1596년 11월경 당시 조정은 이순신과 원균의 문제로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원익은 통제사 이순신을 한산도에 절대로 옮길 수 없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통제사의 교체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는 칠천량해전과 정유재란의 발발로 이어졌다.
명재상 이원익에 관한 일화는 너무 많아 말하자면 끝도 없을 듯하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때 이원익의 인품이 드라마처럼 드러나는 일화가 『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어서 이를 소개하는 것으로 끝마치고자 한다.
『인조실록』 권1, 인조1년(1623년) 3월 16일 병오 5번째 기사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이원익은 충직하고 청백한 사람으로 선조(先朝)부터 정승으로 들어가 일국의 중망을 받았다. <<중략>> 왕이 승지를 보내 재촉해서 불러왔는데,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2010, 역사비평사
한국고전종합DB, 이원익(李元翼)의 『오리집(梧里集)』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