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7일 저녁 7시 여수여해재단 이순신학교에서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이 '천문과 지리 전략가 이순신' 특강을 2시간 동안 했다. 10기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번 특강에는 기업인들은 물론 시장 비서실 직원을 비롯한 공무원, 교사, 시도의원, 국회의원 부인 등 지역의 리더들이 대거 참석했다.
첫째 시간에는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의 책 <이순신, 하나가 되어 죽을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중에서 제3장 '소강상태에 빠진 전선'을 읽고 수강생 3조 대표 정현민 씨가 발표를 했다. 주로 임진왜란 강화 협상기에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머물렀던 1593년부터 정유재란 발발 직전까지의 상황을 발표하고, 이봉수 소장이 지도와 보충 설명을 했다.
둘째 시간에는 천문과 지리 전략가였던 이순신 장군에 초점을 맞추어 이봉수 소장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의했다.

"이순신 장군은 적을 공격할 때는 옥포, 합포, 적진포, 당포, 당항포 등과 같은 포(浦)를 공격했다. 서진해 오는 적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견내량, 착량, 사량, 마량, 명량 등 좁은 협수로인 량(梁)을 지켰다. 량은 조류의 속도가 빠른 해상의 관문으로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진법의 대가였던 이순신 장군은 전장의 지형과 적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진법을 구사했다. 여수에서 경상도 해역으로 출동할 때에는 첨자진으로 항진했다. 일렬종대로 쳐들어오는 적을 집중포화로 궤멸시킨 한산대첩에서는 학익진을 펼쳤다. 옥포해전, 당포해전에서처럼 해안 포구에 정박해 있는 적은 일자진으로 포구를 봉쇄하고 압박해 들어가면서 격멸했다. 안골포해전, 웅포해전, 부산대첩과 같이 왜성에 웅거하며 바다로 나오지 않는 적을 공격할 때는 일렬로 포구를 들락거리며 공격하는 장사진을 구사했다. 해상에서 진을 치고 밤을 새울 때는 원진이나 곡진으로 사주경계를 했다.
이순신 장군은 남해의 복잡한 해안선과 다도해의 특성을 활용하여, 낮에는 지문항해를 하고 밤에는 천문항해를 했다. 어영담이 향도로 앞장서서 큰 역할을 했다. 사리와 조금으로 대별되는 바다의 물때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조류의 흐름이 가장 센 음력 9월 16일에 명량해전에서 승리했다.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은 남해의 지형을 활용하여 평저선인 판옥선으로 첨저선인 왜선을 물리쳤다.
이순신 장군은 바다의 날씨와 해류의 흐름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했던 1597년 초에 부산 앞바다로 출동하라는 왕명을 거절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대한해협의 거센 겨울철 파도와 바람, 쿠로시오난류의 흐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기간 중 임시 수군 기지를 선정하는 데 있어 탁월한 지리 전문가적 식견으로 한산도, 고하도, 고금도에 진을 개설했다. 외해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고 관문을 지키면서 함대를 숨기기 좋은 장소들이다.
이순신 장군은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높은 산에 망군을 내보냈다. 부산포에서 서진해 오는 적을 감시하기 위하여 거제도 대금산에 오수 등의 망군을 배치했고, 거제도 북단을 거쳐 속칭 괭이바다로 진출하는 적을 감시하기 위하여 통영시 광도면 안정리에 있는 벽방산에 망장 제한국을 배치했다. 한산도 상봉이 전형적인 망산이며, 제승당 입구의 고동산도 망산이다. 여수 시전동의 망마산도 적의 동태를 살피던 망산이었고, 명량해전 직전 이순신 장군은 임중형과 임준영 등을 망군으로 해남 달마산 등지로 내보내어 적의 동태를 살피고 정보를 수집했다. 이와는 별도로 소형 협선인 탐망선을 타고 해안을 누비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채탐군도 운용했다.
이순신 함대가 출동하거나 여수로 귀환할 때 하룻밤 정박하고 간 장소들은 대부분 식수나 땔나무 등을 공급받을 수 있는 성(城)이 있는 포구들이 많다. 소비포, 사량도, 적량, 당포, 걸망포, 고둔포, 월명포, 영등포, 송진포, 사화랑, 가덕진, 천성보 등이 이런 장소다.
이순신 장군이 천문과 지리를 활용하여 가장 완벽하게 승리한 전투가 1594년 3월 3~5일 전개된 제2차 당항포해전이다. 벽방 망군 제한국으로부터 적선 31척이 거제도 북단을 지나 속칭 괭이바다로 진출해 온다는 정보 보고를 받은 이순신 장군은 그날 밤 한산도에서 대군을 이끌고 견내량 북단의 지도 앞바다로 진출하여 밤을 새우고, 판옥선 20여 척으로 견내량을 봉쇄했다.
날이 밝자 대군을 이끌고 거제도 북단의 창원땅 증도(시리섬)로 가서 일대에 학익진을 펼쳐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어서 어영담을 인솔 장수로 하는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읍전포에서 적선 6척, 시굿포에서 2척, 어선포에서 2척, 당항 21척을 당파 분멸하여 적선 31척을 전부 격멸하는 일방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 직후 신안의 다도해를 활용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고군산 선유도까지 올라갔다가 목포 고하도로 내려와 겨울을 나면서 조선수군의 재건을 도모했다. 이후 대규모 둔전을 경작할 수 있고, 고흥반도 이서 지역의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는 요충지인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여수는 충무공 이순신 사랑이 남다른 고장이다. 이날 특강에는 여수여해재단 강용명 이사장, 서천석 교장, 박종효 운영위원장, 박이남 이사, 김나현 행정실장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40여 명의 이순신학교 10기 수강생들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