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포 앞에서 우린 무너진다. 공포는 인간을 가장 연약한 존재로 타락시킨다. 공포를 몰고 다니는 전쟁은 겪어보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어찌 보면 지구는 전쟁을 통해 스스로 인구를 조절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끊임없이 인간은 공포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죽어간다. 전쟁은 철학을 만들고 예술을 만들고 문화 콘텐츠를 생산해 낸다. 그러니까 인간은 공포를 통해 죽고 죽음을 통해 부활하며 부활을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이라는 공포를 뒤집어쓰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면 우리는 그 공포를 고스란히 느끼면서 전쟁을 대리 체험한다. 영화 ‘폭격’은 전쟁으로 인해 공포에 휩싸여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다. 화면 속에 담긴 공포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침묵 속의 고통이다. 인간의 연약함에 공감하다가 화가 나고 그 화남에 침묵이 이어지고 그 침묵으로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영화다. 전쟁이라는 태풍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잔인함과 연민이 물밀듯이 몰려온다.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덴마크 코펜하겐에 영국 왕립공군은 레지스탕스의 요청을 받아 게슈타포 본부인 셸후스 건물을 폭격하려는 비밀 작전을 수행한다. 이 작전은 잘못된 목표설정으로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소년 헨리는 사람이 탄 차가 폭격을 받아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실어증에 걸리고 만다. 소년의 부모는 실어증을 고쳐보려고 코펜하겐으로 소년을 보낸다. 그곳에서 소년의 사촌 리그모르의 가족과 함께 보내며 리그모르의 친구 에바와 가까워진다.
다른 한편에는 수녀 지망생 테레사가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다. 테레사는 게슈타포 관여자이자 독일 점령 아래 있던 프레데릭과 금지된 사랑에 빠지고 만다. 테레사는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며 위험한 사랑과 신앙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한다. 원장 수녀님은 그런 테레사에게 따끔한 충고를 한다.
“그 고통을 없애주진 못하지만, 믿음을 잃으면 아무것도 없지”
영국군의 폭격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알게 된 프레데릭은 테레사가 있는 수녀원에 찾아와 전쟁은 곧 끝날 것이고 주님을 찾고 싶다고 말한다. 신에 대한 회의감에 죄를 지어서라도 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테레사는 프레데릭에게 키스를 하지만, 신은 어떠한 벌도 내리지 않자 깊은 고민에 빠지고 만다. 프레데릭은 게시타포를 그만둘 결심을 하고 테레사를 다시 찾아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테레사는 흔쾌히 기도를 알려준다. 테레사는 프레데릭에게 키스로 위로하고 비로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 비행기들이 셸후스를 향해 돌진하지만, 일부 폭탄은 학교 건물로 잘못 떨어진다. 학교와 그 주변은 연기와 불길에 휩싸이고, 어린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게 된다. 이 폭격의 혼란 속에서 소년은 점차 목소리를 되찾고, 구조 작업을 도우며 상처 입은 이웃들을 돕게 된다. 수색과 구출이 이어지는 가운데, 테레사와 리그모르는 잔해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지만, 점점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무너진 잔해에 깔린 아이가 죽어가는 테레사 수녀에게 묻는다.
“테레사 수녀님, 주님께서 연필을 떨어트린 걸까요?”
죽어가는 순간 테레사 수녀 앞에 악마라고 소리 질렀던 프레데릭이 나타난다. 하지만 건물은 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1945년 봄, RAF의 ‘카타리나 작전’은 나치에 맞선 덴마크 저항군의 요청으로 시작되었지만, 단 한 번의 잘못된 급강하가 도시의 맥을 끊어놓고 모두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영화다. 이 영화는 실존했던 사건을 통해 ‘고통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영화를 끌어가는 인물들이 많아 조금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 인물들마다 감정의 섬세함이 잘 드러나 있다. 소년 헨리가 겪은 내면적 고통, 테레사의 신앙 갈등, 에바와 리그모르의 우정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영화의 정서적 중심을 잡고 있다. 이들의 고통은 전쟁의 차가운 메커니즘과 대비되어 더욱 깊게 파고든다. 이 역사의 비극은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민간인 학살의 무고함과 전쟁의 비극이 얼마나 인간에게 비극적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폭격’은 전쟁이 종착역으로 달려가던 마지막 순간에도, 인간의 실수와 운명의 농담이 얼마나 잔혹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증명한다. 공포에 놀라 스스로 주저앉은 인간, 그 죄책감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그리고 역사 뒤에 숨어서 눈알만 굴리고 있을지 모를 인간들에게 붉은 흉터를 남기고 그 공포와 잔인함을 문신처럼 새기고 있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으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공포에 떨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전쟁은 언제나 나쁜 편과 좋은 편을 강제적으로 나눈다. 이 비극은 선과 악의 구분 대신 무고함의 소멸만을 남긴다. 공포에 질린 아이들의 눈동자, 신앙에 매진해야 할 수녀들의 갈등, 시민들의 마지막 숨결은, 역사가 교과서의 잿빛 문장이 아니라 살아 있던 사람들의 떨리는 시간이었음을 환기하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폭격을 뚫고 집으로 돌아와 밥 먹는 에바의 모습에 심장이 따뜻해지면서도 웅장해진다.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기엔 너무 순수한 아이들이 수녀원에 도착해 빵을 먹으면서 했던 말이 내내 가슴에 남는다.
“우린 안 죽었어.”
[최민]
까칠하지만 따뜻한 휴머니스트로
영화를 통해 청춘을 위로받으면서
칼럼니스트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공부하고
플로리스트로 꽃의 경제를 실현하다가
밥벌이로 말단 공무원이 되었다.
이메일 : minchoe29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