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이 코앞이지만 첫눈 온다는 소식은 아직도 가슴에 잔잔한 설렘의 파동을 일으킨다. 격정의 가을빛이 바래지어 마음이 차분해지는 시점에 찾아온 첫눈 오는 날, 아무도 걷지 않은 눈 위에 나만의 흔적을 남기러 길을 나선다. 첫눈 오는 날마저 눈이 와서 불편하다고 귀찮아한다면 삶이 얼마나 팍팍하겠는가.
정조가 건축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水原華城)은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5.4km의 성곽으로,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춘 한국성곽의 집대성 판이다. 수원화성은 사계절마다 그 느낌이 다르지만 첫눈이 내린 날의 수원화성은 베일 속에 가린 실루엣을 보는 것처럼 신비롭다. 눈 덮인 수원화성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 팔달문에서 서장대 방향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서남암문(西南暗門)이 나온다.
겨울 숲에 바람마저 없다면 숲은 적막하다. 그래서 겨울바람은 방랑자이다. 비껴 부는 바람에 흩날린 눈발이 차가운 성벽에 더러는 비누 거품처럼 엉겨 붙고, 더러는 푸르른 소나무에 고운 떡가루처럼 뿌려진다. 억겁의 시간 동안 죽어있던 바윗덩어리가 수묵담채화로 은근한 생명력을 얻고, 푸른 노송과 하얀 눈꽃은 그 어우러짐이 절묘하다.
서남암문에서 서남각루(西南角樓)로 가는 길은 양쪽이 성곽으로 이어진 호젓한 소나무 숲길이다. 신작로처럼 넓은 숲길에 군데군데 서 있는 붉은 휘장이 눈바람에 휘날려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한다. 성벽에 꽂혀있는 영기(令旗)는 오늘따라 유난히 바람에 펄럭인다. 서남포사로 나와 성곽길을 걸으면 서암문(西暗門)으로 이어진다. 포슬포슬한 눈이 내려앉은 눈꽃으로 온 산이 새하얗게 물드는 겨울의 진면목을 선물한다. 설경 속의 수원화성을 가슴에 담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겨울바람은 거침이 없다. 미미한 바람이라도 텅 빈 숲속을 통과하면서 휘익휘익 울린다. 눈발을 헤치고 정상에 올라서니 서장대(西將臺)와 서노대(西弩臺)가 있다. 서장대는 수원화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운 2층의 화성장대(華城將臺)다. 옆의 서노대는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쏠 수 있는 팔각기둥 모양의 벽돌 건축물이다. 성루 아래에 서면 수원 시내와 산자락의 화성행궁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거친 눈보라에 시계는 제로다. 서장대에서 화서문으로 내려서는 숲길은 인적이 끊기고 발목을 넘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이어서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질 것만 같은 불안함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일 뿐 숲을 벗어나자 바로 성곽길이 보란 듯이 나타난다.
서암문 성곽을 따라 화서문 문루를 통과해 팔달산 능선으로 이어진 성벽을 따라 올라간다. 조금만 올라가도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이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눈 덮인 성가퀴 뒤로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지붕 위에서 쉬고 있다. 약간의 바람에도 힘차게 나부끼는 깃발이 서릿발처럼 차게 느껴진다. 곡선으로 이어진 여장(女牆) 위에 쌓인 눈은 성벽을 돋보이게 한다.
수원화성은 화서문과 팔달문을 기준으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八達山)에 걸쳐 있는, 평지 · 산성의 복합 형태다. 화서문 가까이에 있는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적의 동향을 살피면서 공격할 수 있게 만든 3층 건물의 망루다. 공심돈은 전국의 성곽 중 오직 화성에만 2곳 있다. ‘속이 빈 돈대’라는 뜻인데, 벽돌로 쌓아 올린 요새 안에 몸을 숨긴 군사들이 적을 공격하는 기능을 지닌 곳이다.
왼쪽으로 장안공원을 끼고 성곽길을 걸어 북포루(北砲樓)와 북서포루(北西砲樓)를 지나면 장안문(長安門)이 나온다. 장안문은 팔달문처럼 옹성을 두른 2중 성문이다. 팔달문은 일반인의 접근이 어렵지만, 장안문은 성문과 옹성 위를 모두 걸을 수 있다. 화서문에서 장안문 사이는 나지막이 펼쳐지는 수원의 옛 마을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이 일대는 전통문화관, 생태교통마을, 벽화마을 등이 조성되어 있어 둘레길을 돌다가 잠시 들리면 좋다. 규모가 크고 위엄있게 지어진 장안문은 정조가 화성에 행차할 때 가장 먼저 지나는 문이기도 하다.
장안문에서 나와 북동치(北東雉)와 북동포루(北東砲樓)를 지나면 수원화성 성곽길 최고의 명소인 화홍문(華虹門)과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 나온다. 화홍문은 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의 북쪽 문, 즉 북수문(北水門)이다. 일곱 개의 아치형 수문 사이로 물이 쏟아지는 수문 위에 누각을 짓고, 그 안에서 쉬거나 하천의 상태를 관측할 수 있게 만들었다.
눈에 덮인 방화수류정과 용연의 풍광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꽃피는 봄날에 걷는′ 방화수류정(訪華隨柳亭)을 눈을 맞으며 걸으니 이 또한 별미다. 방화수류정이란 별칭을 지닌 동북각루(東北角樓)는 높은 곳에 자리해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이다. 정자 아래 인공연못인 용연(龍淵)을 내려다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위치인 데다가 팔작지붕을 꺾어서 짜고 2층 누각 가운데 온돌방을 두는 등 독특한 건축 형태까지 더해서 수원화성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꼽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록이었을 용연의 수양버들이 온통 두툼한 솜옷으로 갈아입은 채 새벽같이 달려온 여행자를 반겨준다.
성곽길을 따라 동쪽으로 더 가면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와 반대되는 장소에 동장대(東將臺)가 있다. 이곳은 장용영 군사들이 무예를 수련해서 연무대(鍊武臺)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서는 국궁 체험도 할 수 있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과 동북노대(東北弩臺)를 지나면 화성의 동쪽을 지키는 창룡문(蒼龍門)이 나온다. 연무대에서 창룡문을 지나 동남각루(東南角樓)까지는 경사가 완만하고 시야를 막는 건물이 없어서 시야가 확 트이는데, 창룡문에서 동포루까지는 올 연말까지 보수 공사 중이어서 접근할 수 없다.
동일포루(東一舖樓), 동일치(東一雉) 등을 지나면 수원 화성의 독특한 봉수대인 봉돈(烽墩)이 나온다. 산꼭대기에 있는 일반적인 봉수대와 달리 성벽에 맞물리게 만든 점이 독특하다. 동쪽 지형이 평지인지라 다소 지루한 느낌이 나는 성곽에 변화를 주어 수원화성의 미적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한 구조물이다. 봉돈에서 더 가면 수원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이 모두 가장 잘 보이는 동남각루가 나온다. 동남각루에서는 팔달문이 내려다보이는데 성벽은 끊어져 있다. 이곳에서 수원천을 건너 시장을 지나야 팔달문(八達門)에 닿는다.
창룡문 앞 너른 초원에 바람이 부니 은빛 가루들이 날아오른다. 오늘처럼 미답(未踏)의 눈길을 걸으면 생각나는 시(詩)가 있다. 바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선시(禪詩)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나의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라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 눈 덮인 들판을 걸을 때 이 시구를 암송하면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한 해 동안 내가 남긴 발자국이 자신이나 내 이웃에게 부끄러움은 없었는지 반성하게 한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세상을 바르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도 깨우치게 된다.
성을 내려와 뒤를 돌아보니 수원화성에 쌓인 눈만 무심히 밝다. 순정한 백설이 눈부셔 감히 눈을 뜰 수 없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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